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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희 Oct 02. 2024

암행어사 출두

  찢어진 갓에 헤진 옷차림의 이성이 사람들로 붐비는 저자의 주막으로 들어섰다. 주모에게 식사를 주문했다. 옆자리에는 세 명의 장성한 사내들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 중이었다. 


  “관아에서 내일 또 잔치를 연다지 않나.”


  턱 아래로 털이 듬성듬성 돋아난 사내가 수염에 묻은 막걸리를 손으로 훔치며 말했다.


  “백성들 피를 쥐어짜서는 허구 한날 놀고먹고 마시니……. 누가 저런 사또 좀 잡아서 족쳐주면 좋으련만.”


  맞은 편에 앉은 사내가 입안 가득 밀어 넣은 전을 채 씹지도 않은 채 말했다. 사내의 입에서 씹다 만 음식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거, 참 음식이나 다 삼키고 말하지 않고, 원 비위 상해서 술맛이 뚝 떨어지네, 그려.”


  “술맛은 백성들 혈세나 쥐어짜고 기름진 고기로 자기들 배나 채우는 탐관오리들 때문에 없는 것이지. 그렇지 않나!”


  “자네 입에서 튀어나온 음식 찌꺼기도 사또와 그 떨거지들만큼이나 입맛 떨어지거든…….”


  “허허, 말은 그렇게 하면서 전은 잘도 처먹고 그러네. 잔말 말고 술이나 마시자고.”


  수염이 듬성듬성 자란 사내가 막걸리를 순식간에 털어 넣었다. 


  “그나저나, 내일 잔치에 또 온갖 벼슬아치들이 올 것 아니야. 또 기생년들 데려다가 풍악을 울리고 여간 요란하지 않겠군. 저번 사또 생일날은 관찰사까지 왔다고 하지 않았나.”


  옆에 앉은 사내가 말했다. 국밥을 먹고 있던 이성이 수저를 내려놓고 귀를 기울였다. 


  “이번엔 사또 어머니 고희연이라지 아마도.”


  “그러니까 더 하겠지. 벌써 사람들 풀어서 관아 주변을 얼마나 정리하고 꾸며놓았나. 벌써 몇 주째 사람들이 줄 서서 관아를 들락거린다고 하더군.”


  “왜?”


  “왜긴 왜인가. 고희연에 쓸 물건을 채우는 거지. 저자의 장사치들도 압력을 받은 모양이더군. 말이 공출이지 잔치에 충당할 음식과 물건들이지 않겠나. 알고도 모른 척 그냥 바치는 거라네.”


  “참으로 못 할 노릇이군. 쎄빠지게 장사해봐야 세금으로 다 걷어가고, 남는 것도 없는데 매번 잔치 있을 때마다 물건들을 바치라고 하니…….”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이성이 국밥을 다 먹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저자에서 제법 떨어진 솔숲에 서리와 역졸들이 집합해 있고, 이성이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다.  


  “군들은 들으라. 내일은 고을 사또가 잔치를 벌인다고 한다. 이 잔치에 국고와 민의 노동력이 부당하게 쓰인 게 없는지 조사할 것이니, 관아 근처에 대기하도록 하라. 정오에 관아로 출도할 것이다.”


  “네!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이성이 명령을 내리자, 역졸들이 일제히 흩어졌다. 


  “한기태……. 네 이놈 잘 걸렸다.”


  이성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성은 한기태의 악한 성정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와의 인연은 한참을 거슬러 성균관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이성과는 성균관에서 유생으로 만났다. 한기태의 나이가 10살이 더 많았다.  한기태는 무리를 지어 다니며 세력을 만들고, 당시 실세였던 김자점 무리와 야합하며 정치적인 도당을 만든 문제의 인물이었다.


  한양을 빠져나와 왕의 교지를 펼쳤을 때 이번에야말로 한기태의 낱낱을 제대로 파헤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남원에 도착해 역졸들을 풀어 민가에 떠도는 내용만 수집해 봐도 한기태의 악행이 어느 지경에 달했는지 금세 알 수 있었다. 삼정의 문제는 물론이고 여색을 밝히는 호색한으로 악명이 높았다. 성균관에서도 틈만 나면 밖으로 나가 외박을 일삼고 술에 취해 창가를 드나들며 문란한 생활을 하였다. 이성이 한기태의 규칙 위반과 문란한 생활을 문제 삼아 보고하였지만 그를 받치고 있는 도당의 무리들 때문에 손을 쓸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이성은 관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막에서 들은 대로 관아 주변이 지나치게 깨끗했다. 행사 때문에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포졸들이 관아에서 성문으로 이어지는 대로에 배치되어 일반 행인들이 돌아가는 불편을 겪게 했다. 인근 주막에서 서리를 만나 상황을 점검하고 비밀리에 지시를 내린 이성은 포졸들이 지키고 있는 관아로 발걸음을 옮겼다. 인근 지역의 사또와 목사, 관찰사의 가마가 속속 도착하고 이어 교방의 기생들도 관아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관아 안에서 풍악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자, 이성이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관아로 들어가려 했다. 


  “오늘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소. 돌아가시오.”


  포졸이 행색이 초라한 이성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출입을 가로막았다.


  “아니, 이것 보시오. 나도 엄연히 양반인데, 관아에서 연 잔치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게 말이나 되오.”


  “고을에 양반이 어디 한 둘이오. 돌아가시래도!”


  포졸이 이성을 무시하는 말투로 말했다.


  “예부터 잔치가 열리는 날엔 거지에게도 한 상을 차려주는 미풍양식이 있을진대, 나라 녹을 먹는 관아에서 이리 인심이 고약해서야! 내 배가 고파서 그러니 밥만 얼른 얻어먹고 나오리다.”


  이성이 막무가내로 역졸을 밀치고 들어서려 하자, 역졸이 이성의 멱살을 잡고 소리를 질렀다. 


   “이런 거지 같은 놈을 봤다. 썩 꺼지란 말이야!”


  이때 안에서 이방이 뛰어나왔다. 


  “무슨 일이길래 이리 소란스러운가?”


  “아니 이 거지 같은 양반이 자기도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막무가내지 뭡니까.” 


  “밥이나 먹여서 보내도록 하게. 중요한 날에 소란 피우지 말고.”


  이방이 이성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귀찮은 듯이 말했다. 이성은 이방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포졸을 밀치고 관아 안으로 들어섰다. 가야금과 장구 소리에 맞춰 기생들이 춤을 추고, 기름진 고기와 술이 그득한 잔칫상 앞에 비단옷을 차려 입은 벼슬아치들이 앉아 있었다. 마당 한 귀퉁이에 단출한 상이 놓였다. 이성은 쓴웃음을 지으며 차려진 상 앞에 도포자락을 힘껏 젖히며 앉았다. 고희를 맞은 사또의 어머니로 보이는 노인이 중앙에 앉아있었다. 그 주위로 선물로 보이는 물건들이 행열을 맞춰 쌓여 있었다. 이성은 혹시라도 한기태가 자신을 알아볼까 봐 떨어진 갓을 잔뜩 눌러 얼굴을 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색이 초라한 사람은 이성뿐이라 자연히 한기태의 눈에 띄게 되었다. 


  “오늘 이 잔치에 초대받지 않는 손님이 한 분 계시네, 그려.”


  사또가 입을 열자 풍악이 멈추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기태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 시선의 끝에 모서리가 닳은 옷과 떨어진 갓을 꾀어 쓴 양반이 앉아있었다. 사람들이 콧방귀를 끼며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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