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의 만류에도 성이성의 지기였던 박남일은 결국 성균관을 떠나 고향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남일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게야. 과거 시험을 본다 한들 공정하게 치를 수도 없는 세상 아닌가!”
성이성과 김헌이 동재의 마당을 거닐고 있었고, 주위를 살피던 김헌이 이성에게 바짝 다가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탁란한 시기에 굳이 조정으로 나갈 필요가 있겠는가. 과거 시험이야 잠시 미루면 될 일일세. 저렇게 떠나버리면 다시 돌아오기 어려울 터인데…….”
이성이 말했다.
“조식 선생처럼 조정에 나가지 않고 후학을 양성하는 학자로 남겠지. 어찌 보면 남일은 평소에도 학자 같은 면모를 보이긴 했지 않았는가.”
김헌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조정에는 남일처럼 강직한 성품의 선비가 있어야 해. 지금 임금 옆에 아무도 없지 않은가. 반정으로 나라가 혼란해진 틈을 타고 외침이라도 일어나면 어찌할 것인가. 믿을 만한 신하가 없어.”
“반정을 함께 도모한 공신들이 있지 않은가. 모두 요직을 차지하고 똘똘 뭉쳐 있는데…….”
“사람들을 죽이고 궁에 불을 질러 모반을 일으킨 자들일세. 또 언제 서로의 등에 칼을 꽂을지 알 수 없는 일이지. 제주도에 계신 선군을 지지하던 자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그의 일가족들까지 일거에 제거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으니, 나라와 백성은 언제 돌볼 것인가.”
이성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헌도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의 말을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차익돈 말일세. 요즘 한기태 무리와 어울려 다니면서 아주 기세가 등등하더군.”
“유생의 신분으로 반정에 가담한 자들이야 뻔하지 않은가. 힘이 몰린 곳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들러붙는 간신배들이지. 저런 자들이 벼슬에 나간다면 필경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릴 걸세.”
“거참 큰일일세. 이런 분위기에서 견딜 수 있는 유생이 얼마나 되겠는가.”
김헌의 말에 이성이 표정을 굳히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박남일이 낙향한 후 김헌은 성이성과 함께 있는 날이 부쩍 많아졌다. 지기를 보낸 헛헛한 마음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지만, 혼자 다니다가 한기태 무리라도 만나면 무슨 봉변을 당할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반정 이후 한기태는 보란 듯이 자기 눈에 거슬리는 유생들을 겁박하고 다녔다. 김헌과 같이 다니는 날이 더 많아지면서 한기태의 눈에 성이성도 거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눈여겨보아도 이성에게서 흠을 잡을 수는 없었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법이 없이 조용히 자기 할 일에 집중하는 모습만 보였기 때문이다. 강독과 강회에서 보여지는 그의 학문적 수준도 상당했으므로 직강과 박사, 좨주까지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김헌 저자는 성이성과 무슨 모의를 하길래 저리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경계하는 거지?”
동재를 지나던 한기태가 말했다.
“저자들은 불순 세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저런 유생들이 유유자적하게 마당을 거닐고 있다니…….”
옆에 있던 차익돈이 말했다.
“저 둘 말일세. 계속 거슬린단 말이지.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한기태가 작은 눈알을 돌려 익돈을 바라봤다. 한기태의 찢어진 눈 속에 유난히 작은 수정체와 눈이 마주친 차익돈은 발이 여러 개 달린 벌레가 몸을 스친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그가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이후 유난히 작은 수정체와 눈이 마주칠 때면 사람의 것이 아닌 이물을 본 것처럼 섬뜩함이 느껴졌다. 실제로 그는 자기편이 아닌 자들은 모두 적으로 간주하고 제거하려 들었다. 반정 이후 한기태의 밀고로 유생의 신분을 상실하거나 목숨을 잃은 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차익돈도 살아남기 위해 한기태와 손을 잡았지만, 그에 대한 인간적 신뢰는 전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조정으로 나가기만 하면 그와의 관계를 미련 없이 정리할 생각이었다.
“김헌은 허점이 많은 유생이니 미끼를 던지면 쉽게 걸려들 겁니다. 하지만 성이성은 신중하고 빈틈이 없는 자라 쉽지 않을 겁니다.”
“성이성이라……. 그의 주변으로 유생들이 모이는 것 같으니, 주시해야 할 걸세.”
“곧 정기 시험이 있을 테니 거기에 미끼를 던져보지요.”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이번엔 김자점 영감님의 도움이 필요할 듯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김헌의 말에 한기태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야비하게 웃었다.
성균관에서 정기 시험이 치러지는 날이었다. 한기태와 차익돈은 어떤 문제가 출제될지 이미 알고 있기라도 하듯이 유독 여유로운 태도로 시험장으로 들어섰다. 시험 감독과 평가를 맡은 대사성은 김자점과 한패였고, 김자점이 고관의 자격으로 시험 출제에 직접 참여했다. 문제지를 받아든 성이성과 김헌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특히 김헌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울분을 참지 못한 김헌이 미끼를 덥석 물었다. 시험이 끝나고 김헌을 비롯한 몇몇 유생들이 사헌부로 끌려가 취조를 받게 되었다.
“지난 성균관 시험에서 국왕의 정책을 반대하고 지난 정책을 옹호하는 내용을 적어 왕권에 도전한 사실을 인정하는가?”
집의가 물었다.
“임금의 정책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 잡고 국력을 신장시키기 위한 방안을 제시한 것뿐입니다.”
김헌이 담담하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소신을 지키면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 그간 많은 주의를 기울였지만, 어느 순간 아무리 자신이 발버둥 쳐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뒤 그의 마음에서 두려움이 사라졌다. 답안지에 답을 써내려 가는 순간 각오한 일이기도 했다.
“후금과 친선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답안은 현 조정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자리를 물러난 임금을 옹호하는 내용임을 모른단 말인가?”
“후금은 이미 명나라와 조선을 위협할 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라와 백성이 외세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현실적 대안일 뿐 어떤 정치적 의향도 없습니다.”
“아직도 분위기 파악이 안 된 모양이군!”
집의가 가벼운 코웃음으로 그를 모욕했다. 김헌은 이제 목숨도 아깝지 않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더는 살아남기 위해 조금도 눈치를 보거나 머뭇거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났다. 사헌부의 신문과 조사가 끝난 뒤 김헌은 유생 자격을 박탈당하고 유배지 남해로 귀양 초치가 내려졌다. 정기 시험 이후 김헌처럼 미끼를 덥썩 물고 쫓겨난 유생들이 여럿이었다. 이렇게 이성은 또다시 지기를 아프게 떠나보내야 했다. 유배감들이 김헌을 이송해 갈 때 배웅을 나온 이성과 눈이 마주쳤다. 이성이 안타까운 눈으로 김헌을 바라봤다. 비록 입 밖으로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두 사람은 마치 서로의 마음을 읽어 나가는 것 같은 눈빛을 교환했다.
‘지금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난세라네. 조심하라고 그렇게 일렀건만, 무뢰배들의 미끼를 물어버리다니. 나의 지기여! 시절을 한하노라. 시절을 한하노라.’
‘그래, 이성 자네라도 끝까지 버티게. 끝까지 살아남아야 하네. 나는 반드시 돌아오겠네. 나같은 선비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부디 애써주게나.’
‘태평성대에 우리 다시 만나게나.’
‘그러세. 태평성대에 다시 만나게!’
이성이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꾹 참으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반대편에서 한기태의 무리가 김헌의 귀양길을 구경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지켜보고 있었다. 한기태가 성이성을 발견하고 그를 응시했다. 이성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한기태를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