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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희 Nov 24. 2024

매화가 피는 계절

  성이성이 성균관으로 돌아왔을 때 난으로 어지러워진 경내의 복구가 한창이었다. 성균관의 마당에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교목 사이로 한기가 서린 바람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교목 아래 가지런히 손질한 개나리 가지에서 노란 꽃봉오리가 맺히고 있었다.


  “자네 무사히 돌아왔구먼.”


  대사성 김반이 이성에게 다가와 반색했다.


  “함장님께서도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갓과 도포를 단정히 갖춘 이성이 잰걸음으로 다가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아버님을 따라 임금님의 공주 호송을 도왔다는 소식 들었네.”


  “많은 유생들이 임금님과 호송하는 신하들을 돕기 위해 먼 곳에서 찾아와 음식과 입을 것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래,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행동하는 자가 진정한 선비일세. 엄동설한에 고생이 많았겠구먼.”


  김반이 이성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함장님께서야 말로 성균관을 지키고 복구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지요. 저야 아버님 옆에서 그저 시키는 일만 했을 뿐입니다.”


  “성균관 유생들이 아직 복귀 중이고 돌아오지 못하는 유생들도 있을 게야.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색장을 맡아 분위기를 잡아주었으면 하네만…….”


  “선배님들도 계신데 제가 어찌 색장을 맡겠습니까.”


  “이곳에 먼저 들어온 게 벼슬이라도 되는가. 자네가 색장을 맡으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을 걸세. 이런 혼란한 시기에 자네 같은 인재가 꼭 필요하네.”


  김반의 말에 이성이 아무런 말이 없었다. 김반이 이성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으며 말했다.


  “시기적으로나 자네 같은 사람이 꼭 필요해서 부탁하는 것이야. 지나친 사양은 도리가 아니라네. 유생들이 모인 자리에서 수여식이 있을 것이니 그리 알고 있게나.”


  이성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김반이 미소를 지으며 이성의 팔을 가볍게 두어번 두드렸다. 그리고 할 일이 생각난 사람처럼 부산스럽게 어디론가 급히 걸음을 재촉했다. 이성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대사성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난리를 겪고 난 뒤라 그런지 일상의 모습이 모두 아련하게 보였다. 지금 성균관의 뜰에 서서 대사성과 안부를 주고받은 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실감나지 않았다. 김반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이성이 걸음을 떼어 성균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명륜당의 뒤뜰에 이르렀을 때 은은한 향기가 났다. 엄동설한에 꽃을 피워낸 매화나무였다.


  “추운 줄도 모르고 꽃을 피웠구나! 이토록 여린 꽃잎으로 남은 추위를 어찌 견디려고……”


  이성은 문득 추위를 견디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 걸까 궁금했다. 매화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이성이 다시 혼자 중얼거렸다.


  “너는 미세하게 길어진 낮의 시간과 바람에 실린 작은 온기를 가장 먼저 감지하는구나! 네가 봄을 기다리며 꽃을 피우는 동안 우리는 아직도 겨울이라고 몸을 웅크리고만 있었는데 말이다.”


  가지 끝에 개화한 매화에 코를 대고 향기를 맡아보았다. 가까이에서도 뒤뜰을 들어섰을 때 허공으로 번져 나오던 향기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이토록 아련한 향기로 허공을 메우다니!' 이성은 마치 좋은 지기와 대화를 마친 사람처럼 뒤뜰을 나올 땐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이성의 도포 자락이 하늘거릴 때 마나 은은한 매화 향이 배어 나왔다.


  어느덧 명륜당 뒤뜰의 매화가 만개하고 개나리의 단단한 꽃봉오리도 노랗게 꽃망울 터뜨리며 빼곡하게 가지를 채웠다. 성균관의 수업이 정상화될 무렵 대사성 김반의 예고처럼 이성은 색장으로 임명을 받았다. 복구가 마무리되고 느지막하게 성균관으로 복귀한 한기태가 이를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한기태가 명륜당을 나서는 대사성 김반을 좇아 나왔다.


  “함장님, 엄연히 선배들이 있는데 굳이 선배들을 제치고 성이성을 색장으로 임명하셔야 했습니까?”


  한기태가 급히 따라 나오느라 호흡이 가뿐 상태로 말했다. 그 바람에 불만을 품고 있던 한기태의 말투가 더욱 퉁명스럽게 들렸다.


  “성이성도 엄연히 선배로서 공고한 위치에 있는 유생일세. 누가 누구를 제쳤다는 말인가?”


  김반의 말투에 냉기가 서렸다.


  “선배인 제가 후배의 지시를 받고 감독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선후배 간의 질서도 파괴되고 후배들이 기고만장해져서는 선배를 우습게 보는 분위기가 조성될 것입니다.”


  “이곳에서 졸업하는 시기는 과거 급제를 하는 날인데, 자네처럼 낙방하여 유생 신분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게 밀려 있는 유생들까지 고려할 만큼 여유가 없다네. 지금 같은 시기에 꼭 필요한 사람이 색장이 되어야지. 연공서열일랑 조정에서나 찾을 일이지…….”


  김반이 한기태를 한심한 듯 바라봤다. 


  '김자점을 믿고 무례하게 성균관 내 질서를 어지럽히던 자라는 걸 내가 모르는 줄 아는가! 선배 운운하고 싶으면 선배다운 면모를 보이지 않고서. 학문으로나 성품으로나 성이성과는 비교가 되어야 말이지. 가당치도 않지.' 


  김반이  차마 입밖으로 내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키고 있을 때 한기태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모습을 본 김반이 괴심한 마음에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는 나라에 그 난리가 났을 때 어디에 있다가 이제야 나타났는가? 피해를 입고 복구가 한창일 때도 모습이 보이지 않더니, 복구가 끝나고 수업이 정상화될 무렵 느지막하게 나타나지 않았는가. 성이성은 성균관 복구에 힘을 보태기 위해 일찌감치 찾아와서 경내 곳곳을 살피며 정성을 들였네."


  한기태가 당황한 듯 아무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사선을 돌리며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김자점과 한치도 다를 게 없는 간사한 인간이군. 이미 고인 물이고 썩어 가고 있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김반이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다. 한기태가 김반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자리를 피했다.


  그날 이후 한기태는 김반과 성이성에 대한 분노로 보복을 시작했다. 그는 그의 무리들과 함께 난리 이후 성균관 내에 기강이 허물어져 선후배 간의 서열을 무시하고 성이성을 색장으로 임명한 것에 대해 상소를 올렸다. 그리고 이괄의 난으로 반대 세력에 경계가 삼엄해진 틈에 성균관 유생 중 조정에 반하는 사상을 가진 자들이 있음을 고하는 상소를 잇달아 올리는 등 보복성 행보를 이어나갔다. 한기태가 분노로 폭주하는 동안 이성의 아버지가 통정대부 성안의라는 것이 성균관 내에 알려지게 되면서 유생들의 이목이 성이성에게로 쏠리고 있었다. 이에 더해 색장을 맡아 활동을 시작하니 그간 드러나지 않던 이성의 존재감이 더욱 두드러졌다. 자연스레 이성을 믿고 따르는 유생들이 점차적으로 늘어났다. 반면 한기태는 살아남기 위해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끈에 매달려 연명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와 근본적으로 다른 그를 더욱 시기했고 곧 과거 급제를 할 줄 알았던 기대와는 달리 성균관 유생으로 남아 있는 데 화가 나 있었다. 그는 늘 분노와 보복심으로 가득 차 자기 눈에 거슬리는 사람들을 제거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그를 따르는 무리들도 점점 규모를 잃어가고 있었다.


  성이성은 한기태의 폭주를 그냥 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의 계략으로 성균관을 떠난 박남일과 귀양을 간 김헌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성이성은 색장을 맡아 그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는 명분도 있었지만, 꽃망울을 터뜨릴 시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더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간 잃어버린 것들을 하나씩 되찾고 더는 잃는 것이 없게 하기 위해서라도 더는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유생 성이성 삼가 아룁니다. 그간 성균관의 기강을 어지럽히는 일들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어 상소를 올립니다. 유생 한기태는 성균관 유생으로서의 본분인 학문에 힘쓰지 않고, 불필요한 논쟁을 만들어 시간을 허비하고 도당을 만들어 파벌을 조성하였습니다. 또한 조정의 대신들과 결탁하여 도당의 무리들과 상소를 올리고 시위에 참여토록 하였습니다. 자신의 무리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후배들을 겁박하여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 같은 불량한 유생들을 엄격히 경계하시어 유생들이 하루빨리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단호한 조치를 취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성이 대사성 김반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평소 한기태를 못마땅히 여기고 있던 김반이 상소를 확인하고 지체 없이 승정원으로 보내 조사하게 했다. 한기태에 대한 조사가 착수되고 이성은 곧이어 박남일과 김헌의 복귀를 위한 상소를 써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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