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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기 Jun 05. 2024

아저씨는 누구세요?

그리고 구명조끼를 입은 이순신 장군

[페르세우스의 피가 섞인 아이들 중 오늘 가장 먼저 태어나는 이가 미케네와 티린스의 왕이 되리라.]

신들의 왕 제우스가 곧 태어날 자신의 아들 헤라클레스를 위해 내린 신탁입니다. 그러나 난봉꾼 남편이 미웠던 헤라는 페르세우스의 또 다른 손자 에우리스테우스를 어미의 태중에서 바로 끄집어내 신탁을 가로챘어요. 헤라는 또한 성인이 된 헤라클레스가 에우리스테우스를 주군으로 섬기는 것을 거부하자 그에게 마법을 걸어 제 아내와 아이들을 사자 무리로 착각하게 만들었는데, 이에 헤라클레스는 그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야 맙니다. 마법이 풀린 후 자기가 한 짓을 보고 절망에 빠진 헤라클레스에게 헤라는 죄를 씻기 위해선 에우리스테우스를 섬기며 그가 내리는 과업을 완수해야 한다는 신탁을 내립니다. 사진을 봅시다.


헤라클레스와... 아저씨는 누구세요?

왼쪽은 4세기에서 5세기 사이에, 오른쪽은 13세기 경 만들어진 대리석 조각으로, 둘 다 베네치아 성 마르코 성당의 전면을 장식하고 있는 부조입니다. 먼저 왼쪽 것부터 살펴볼까요? 벌거벗은 근육질의 남성이 나타나 있습니다. 동물 가죽을 망토처럼 른 채 멧돼지 마리를 들쳐메고 있어요. 그런 그의 모습에 놀라 항아리에 숨은 누군가가 오른쪽 구석에 작게 나타나 있습니다. 농지를 망가트리고 사람을 해치던 괴물 멧돼지를 생포해 온 헤라클레스와 겁에 질린 에우리스테우스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등장인물들의 중요도에 따라 크기에 차등을 두는 방법은 간결하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어 로마인들이 즐겨 사용하던 표현법이에요.


이제 오른쪽의 부조를 봅시다. 이 이름 모를 조각가는 선배의 작품을 그대로 따라하려 한 것으로 보여요. 인물이 취하고 있는 자세가 똑같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부조에서는 헤라클레스를 상징하는 도상을 하나도 찾을 수 없습니다. 열두 과업의 괴수들 대신 숫사슴을 들쳐메고, 또 네메아의 사자 가죽 대신 평범한 망토를 걸친 사내의 발 아래에는 어디서 왔는지 모를 용 한 마리가 꿈틀대고 있어요. 이 조각가는 사실 고대의 부조가 헤라클레스를 나타낸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거에요. 그래서 그는 자신이 알아보지 못한 요소들을 모두 제멋대로 바꿔 단순한 권선징악의 메시지를 표현하는 데 그쳤습니다. 내용 theme 은 알지 못한 채 외형 motif 만 간신히 흉내낸 셈이죠.


이야기가 시간과 공간을 넘어 다른 사람들에게 온전히 전달되는 경우는 드뭅니다. 기록을 남긴 사람의 주관이 섞이는 것은 당연하고, 전달 과정에서 외부 요인에 의해 (자연재해나 인위적인 조작 등) 훼손될 수도 있으며, 보는 사람이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시 변형되어 퍼지기도 합니다. 가끔은 위에서처럼 하나도 해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데, 이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받은 사람이 무식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고대인들이 생각했던 헤라클레스와 중세 사람들이 생각했던 그의 모습은 정말 많이 달랐거든요.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하고 달력이 널리 보급되기 이전의 세상에선 어제와 오늘을 구별하는 게 큰 의미가 없었어요. 사람들은 시간을 뻗어나가는 선이 아니라 끝없이 반복되는 원으로 인식했는데, 이렇듯 희미한 시간감각은 곧 고대와 현대 (즉 중세) 의 경계도 희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림을 봅시다. 베네치아 출신 작가이자 화가였던 크리스틴 데 피잔이 저서  Epistre d'Othea 에 직접 그린 삽화입니다. 무엇이 나타나 있나요?


크리스틴 데 피잔, [바다 괴물], 1401ca, 양피지에 템페라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죠?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입니다. 음... 바닷가의 미녀와 괴물, 말 탄 영웅까지 있어야 할 것은 다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뭔가 이상합니다. 페르세우스는 중세의 여느 기사들처럼 반짝이는 투구와 판금 갑옷을  차려입고 말에는 마갑까지 씌워 완전무장했습니다. 안드로메다 또한 뭇 중세 공주님들처럼 예쁜 드레스를 차려입었어요. 이 위화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입니다. 다시 말해, 데 피잔은 그녀보다 천 년도 더 전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중세의 갑옷과 드레스를 입혀 나타낸 거죠. 테마는 일치하지만 모티프가 맞지 않는 경우입니다. 영화 [명량] 에서 이순신 장군님이 방탄모를 쓰고, 전투복과 구명조끼를 입은 채 손에는 기관단총을 들고 "학익진을 펼쳐라!" 하는 꼴을 상상해 보세요. 중세 사람들은 고대가 이미 끝났음을, 그들이 새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을 내일. 그들은 그렇게 살았어요.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에 관해: https://brunch.co.kr/@oogie-kim/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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