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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한참 후에 온다

by 아무개


겨울은 늘 늦게 온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 바람이 유리창을 두드리면 내 마음도 두드린다. 얼음처럼 차가운 무언가가 가슴 한복판을 스치고 간다. 나는 그것이 겨울의 예고편이라는 것을, 이미 몇 번의 계절을 지나며 배웠다.


추위를 알리는 건 온도가 아니다. 쓸쓸함이다. 사람들은 점점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고, 거리에선 웃음소리가 희미해진다. 따뜻한 커피잔을 쥔 손은 홀로임을 더 선명히 기억해낸다. 하지만 겨울의 진짜 얼굴은 그 뒤에 있다. 침묵 속에서 기다리는 눈송이, 하얀 눈 속에서 우리를 감싸 안는 조용한 위로.


눈은 겨울을 가장 잘 설명한다. 그것은 아무 말 없이 내리는 시(詩)다. 모든 것을 덮으면서도, 무엇 하나 빼앗지 않는다. 흙을 감추고 나뭇가지를 두껍게 감싸며 우리가 알지 못했던 세상의 결을 보여준다. 공지영의 글 속 깊은 상처가 그러하듯, 눈은 아픔을 덮어주면서도 그 안의 맨살을 드러내 보인다. 진은영의 시처럼 눈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대신해준다. “눈 속에서만 우리는 잠시나마 모두 같은 존재로 돌아간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겨울은 우리에게 묻는다. 잃어버린 것들을 생각해 보았느냐고, 떠난 이들의 뒷모습을 기억하느냐고. 그러면서도 조용히 덧붙인다. 그럼에도 네가 여기 있다고. 얼어붙은 가지 끝에서, 봄을 품고 있듯이.


봄은 늘 겨울을 지나온다. 그러니 겨울이 올 때마다 나는 겨울의 침묵을 더 오래 바라본다. 그것은 떠남의 계절이지만, 동시에 모든 시작의 계절이다. 얼어붙은 땅 아래엔 씨앗이 숨 쉬고 있고, 차디찬 공기 속에서 삶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겨울이야말로 완벽한 질문이다. 그리고 답은 언제나 다가올 계절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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