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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아이를 허리로 낳는다

영화 '서브스턴스'를 보고 (스포일러 있음)

by 아스트랄

"기억하라. 너희들은 하나다."


... 라고, 얼굴이 가려진 누군가가 한 손 바닥에 찌그러진 노란 찰흙 뭉치를, 또다른 손바닥에 예쁘게 동그란 모양의 조금 작은 찱흙 덩어리를 올려놓고. 두 덩어리를 합치면서 이렇게 말한디.


늙은 여배우(엘리자베스)가 욕실에서 맑은 연두색 '액티베이터'를 몸에 주사하면, 눈동자가 갑자기 두 개가 되면서, 허리 척추 부분의 피부가 홍해 갈라지듯 좌악 갈라지며, 젊고 아름다운 여성(수)의 신체가 '태어난다.'


이 여성은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고 매우 만족하며, 자신의 '껍질'로 누워있는 '모체'를 한심하게 비웃듯 바라보다가 할 수 없다는 듯, 자신이 빠져나온 등과 허리 부분의 갈라진 피부를 듬성듬성 꿰멘다.


일주일 후, 다시 모체로 돌아온 자아가 샤워를 하는 모습이 반복되는데, 놀랍게도 이 꿰멘 등의 피부가 점점 아무는 모습을 보인다.


... 그런데,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대체, 뭐가 '하나' 냐고? 누가 봐도 나이먹은 50대 엄마가 젊은 20대 딸을 허리로 낳는 거잖아! 젊고 건강하고 거칠 것 없는 철없는 딸은 엄마의 '골수'를 빼먹는 '등골 브레이커' 짓을 하다가 결국 엄마는 딸을 못 죽이고, 딸이 엄마를 죽이는 결과를 낳는 거잖아! 라고.


엘리자베스와 수의 관계가 엄마와 딸이라는 건 수가 처음 엔터테인먼트사 사장인 '하비'와 계약을 할 때부터 하는 말에서 알 수 있다.


"일주일 뒤에는 촬영을 하지 못해요. 엄마가 아프셔서 제가 돌봐야 하거든요."


뭐... 일주일씩 몸을 바꿔야 하는 사정을 변명하기 위한 말이기도 하겠지만. 명백하게 드러나는 모체(엄마)와 복사체(딸)의 관계가 확실해 보인다. 진짜 생명을 낳는 것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무성생식이라는 점 뿐.


여기서부터는 영화를 보고난 뒤 또 다시 연결고리처럼 떠오른 단상.


... 예전에는 엄마들이 아이들을 낳으면 그저 먹이고 입히고 학교 보내면 되었는데, 요즘은 말 그대로 '골수를 빼서' 키워야 한다. 정말이지 허리로 낳는 것 같다. 굳은 신념을 가지고 스마트폰을 안 사주다가 마침내 애들이 친구들과 함께 게임이나 채팅이나 sns를 못 해서 왕따가 되고, 초등학교 때부터 시킬 필요가 있나 싶어서 사교육을 안 시키다가 나중엔 애들이 학교에서 비교당하고 무시당하다가 우울증에 걸려버린다.


이게 현실이다.


그러면 '허리로 낳은' 애들은 다 성공하고 효도하나? 효도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돈을 많이 벌 확률은 높겠지? 모든 것이 원래 '투자한 만큼 거둬들이는'경우가 대부분이니까... ?


대치동으로 이사가고 학원에 수억원을 뿌리고 어릴 때부터 유학의 길로 들어서도록 독려하면, 또는 국제 학교로 보내면, 인성과 실력을 함께 쌓은 글로벌 인재로 성장하게 될까? 뭐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그래서 떼돈을 벌어 한남동 수십억 아파트에 살게 되고 다시 그들은 허리로 애들을 낳고.. 또 그애들도 커서 다시 허리로 애들을 낳고...또 그 애들도 허리로 애들을...


그래서 '수'가 '엘리자베스'를 죽이고 나서 또 다시 남은 '액티베이터'주사를 남용해 드디어 '몬스트로 엘리자수'를 탄생시키게 되는 거다.


아마 '수'는 '터미네이터'를 사용하다가 중지한 (수를 살리기로 결심한) 엘리자베스의 행동이 자신을 '살리려고'가 아니라 '죽이려고'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이 자신을 향한 강한 의심, 자기부정, 불신은 스스로를 죽인다.


'엄마를 죽여서는 안 됐다. 그 생각을 못 했네. 엄마를 죽이면 나도 죽는 건데.'


'수'는 푸른 드레스를 입고 가장 화려한 신년 초대 무대에 서기 일보 직전에 이빨이 차례차례 빠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때 그렇게 깨달았을 거다.


그리고 모든 생명체의 일차적 목적은, 바로 죽기 전 '유전자'를 남기는 것일테니... 그래서 어찌 됐든 탄생한 '몬스트로 엘리자수'는, 다시 껍데기가 되버린 '수'는 그럴 줄 몰랐겠지만..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외모를 넘은 딸이 되버린 거다. 그래도 '몬엘수'의 멘탈은 세상 최강이다. 몬엘수가 대체 뭘 잘못했지? 무대에 서야 해서 열심히 꾸미고, 단장하고 무대에 선 것 뿐인데! 몬엘수를 공격한 건 하비와 관객들이라고! 단지 자신들이 보기 흉악하다는 이유로! 몬엘수가 일부러 그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피를 뿌린 건 아니라고!


요즘 아이들의 삶의 목적은 대부분 '부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부자'라는 기준이 명확하지가 않다는 거다. "돈을 많이 벌면 뭘 할건데?"라는 질문에, 대부분은 "집을 사요" "차를 사요" 까지 얘기하고 끝. 더이상 어떤 이야기도 나오지 않는다. '얼마까지가 목표인지'를 묻는 질문에도 마찬가지다. 그냥 단순히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가 끝이다. 뭐..다른 사람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라던가, 원대한 꿈을 가지라는 말 따위 하고 싶지 않다. 중요한 건 그 다음이다. 그래서, 혼자 부자가 되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모든 관심을 쏟는 나머지, 남들이 어떻게 살아가든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아니, 사실 관심을 가지지 '못한다'. 왜?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이 오로지 '1등급'을 받는 것만을 목표로 두고, 그 외의 것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경주마의 왼쪽 오른쪽 눈 옆쪽을 작은 판자로 가린 형국과 똑같다.


나는 걱정이 된다. 내가, 우리가 1등만을, 완벽함만을 추구하는 '수'를 낳고, 그 '수'가 나를, 불완전하고 늙고 지저분하고 병든 모체를 죽이고 파멸하거나 또는 또다른 몬스터를 낳아 '편견'이라는 거대한 몬스터들에게 짓밟혀 버릴까봐.


"기억하라, 너희들은 하나다!" 라는 말이 이제 단지 엘리자베스와 수가 자아를 공유하고 있다는 말로 들리지 않는다. 사실 생각하면, 우리는 모두, 이 우주와 세상과 별과 모든 무생물과 생명체와 인류는, 하나가 아니던가? 왜 스스로 그렇게 자기 자신을 싫어하고, 스스로를 파괴하려고, 죽이려고 하지? 왜 모든 특정한 분야에서 1등이 되어야만 하지? 왜 완벽해야만 하지? '아름다움'과 '좋음'은 같은 건가? '못생김'은 '나쁨' 인가? 왜 누군가를 '밟아 뭉개야만' 내가 살 수 있다고 가르치는 거지? 왜 '누굴 죽여야만'내가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같이 좀 살아갈 수 있는, 그런 분위기를 만들면 안 돼나?


몬스트로 엘리자수가 무대에서 엄청난 피를 객석으로 뿌릴 때, 공연을 보러 온, 한껏 치장한 부인이 옆 자리에 앉은 어린 딸의 눈을 가려주던 장면이 떠오른다.


'보지 마, 저런 흉측한 건. 저런 끔찍한 건. 너는 예쁘고 아름다운 것만 봐.' 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어떻게 하나요.

'몬스트로 엘리자수'를 탄생시킨 건. 바로 당신들인걸요.

그래서, 당신 딸도 얼마든지, 저렇게 될 수 있는걸요.



영화 '서브스턴스'를 보고


아스트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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