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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열쇠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보고

by 아스트랄

현빈, 아니 유진우. 잘생기고 성공한 젊은 아이티 업계 유망주. 여성에게 매너 있고 심지어 츤데레에 뇌섹.. 끼(?)까지 넘치는, 모든 로맨스 드라마와 만화의 프로토 타입인 이 남자의 사적인 삶은 사실 아주 엉망진창이다.


무려 결혼을 세 번씩이나 하고 실패했으며, 천재 게임프로그래머(정세주)의 사업제안을 받고 혼자서, 스페인의 '그라나다'까지 오게 된다.


그곳에서 우연히, 이혼한 전 부인(이수진)을 마주치게 되고, 그녀의 불룩한 배를 보게 된다. 그의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아간 건 바로 십.. (욕 금지용 말 줄임)년 지기 친구이자 자신의 사업 파트너였던 '차형석'.


유진우는 천재 게임프로그래머 세주가 개발한 증강현실 게임으로 들어가는 렌즈를 끼고, 그라나다의 한 공원에서 마찬가지로 게임에 참여한 차형석과 대결한다. 플레이어 대 플레이어로서.


여기에 사심이 들어가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거다. 유진우는 게임 속에서 차형석을 시원하게 칼로 베고, 드디어 처절한 복수를 실행한다. 게임에서 이간 직후의 유진우의 표정은ᆢ 정말이지 초딩 고학년 남자애의 표정. 딱 그 정도. (서른 살이 넘은 아저씨라 아싸!라는 추임새를 차마 넣지는 못했던 것 같다ᆢ^^)


하지만ᆢ 그것이 바로 지옥으로 가는 헬게이트를 여는 열쇠였으니ᆢ다음 날, 현실의 차형석이 그 공원 벤치에서 피투성이 시체로 발견된다.


그때부터였다. 유진우의 인생이 진정으로 망가지기 시작한 것은.


이후, 눈만 뜨면 항상 찾아오는, 실제로 찾아와서 자신에게 끊임없이 검을 휘두르는, 피투성이가 된 '죽은 친구' 차형석 때문이다. 그는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죽일 수도 없고, 자신이 자고 있지 않는 한 사라지게 만들 수 없다.


여기서 셰익스피어의 희곡 '멕베스'에서의 한 문장이 떠오른다. Sleep no more. 더 이상 잠들지 못하리. 휴식을 위해 꼭 필요한. 건강을 회복시켜 주고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그 잠을, 멕베스는 던컨왕을 살해함으로써, 더 이상 누릴 수 없다. 영원한 죄책감의 어두운 굴레에 빠져버린 것이다.


하지만ᆢ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서는 그 반대로, 유진우는 낮을 살아갈 수가 없다. 영원히 잠들기 전까지. 차형석의 망령이 질기게도 쫓아오는 것이다. 맥베스에게 죽임을 당한 뱅코우가 환영이 되어 멕베스를 쫓아온 것처럼.


유진우는 자신도 모르게 서버에 계속 접속되어 버리고, 시시각각 자신을 죽이려 찾아오는 친구의 유령.. 아니 NPC? 그것도 아니면.. 버그? 때문에 말 그대로 미친 듯 레벨업을 하기 시작한다. 오로지 살기 위해ᆢ


죄책감이 만들어낸 지옥


차형석은 유진우의 죄책감이 만들어낸 유령이다. 유진우는 잠을 잘 수도, 깨어있을 수도 없다.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차형석은 계속 나타난다. 그래서 유진우는 마지막으로 선택한다. 그 모든 버그를 '디버깅'하기로. 자기 자신까지도.


'천국으로 가는 열쇠'를 게임 속 NPC '엠마'에게 맡기고, 그는 엠마의 처분대로, 영원히 게임 속에 남는다. 그가 죽였던 차형석처럼. 유령이 된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열쇠는 어디에도 없다.

대신, 지옥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아주 작은 현실의 벽에 생긴 금 사이로 새어버린 검은 잉크처럼, 그렇게 번져서 커져버린다.


욕망이 불러일으킨, 사소한 오해와 불신, 질투, 열등감, 그리고 배신과 분노. 이런 것들로 삭고 녹아 깨져서 열려버린 지옥의 문틈 사이로 흘러내리는 영혼을 본다.


유진우를 질투하고,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했던 차형석도, 사업에 바빠 아내를 등한시하는 바람에 절친에게 사랑하는 부인을 뺏기고 분노와 복수심이 가득했던 유진우도, 모두 결국 게임 속 NPC가 되어 버렸다.


천국으로 가는 열쇠는 존재하지 않는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언젠가 우리가 맞닥뜨릴지도 모르는. 아니, 이미 겪고 있는 일상과 가상현실의 붕괴를 그리고 있다.

아직 아니라고? 그렇다면 당신이 매일 친구들에게 보내는 유튜브 링크를 보라. 그 내용이 모두 진실일 거라고 어떻게 단언하는가?


우리는 그 어디로든 갈 수 있지만, 또한 그 어디에도 도달할 수 없다.


유진우는 천국에 도착한 것일까? 그가 생각하는 천국은 아마 자신에게 어마어마한 부와 명성을 가져다줄 세주도,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연인 희주도 없지만, 자신의 친구이자 연적이자 영원한 고통인 차형석과, 즉, 자신의 죄책감과 더 이상 만날 일이 없는 평안한 세계일 것이다.


희주는 유진우가 언젠가 모습을 나타내리라 생각하지만, 유진우는 아마 죽을 때까지(증강현실 게임이 소멸할 때까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게임 속에서의 대결이었고, 죽일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차형석을 죽였다는 사실과 그에 뒤따르는 죄책감은 현실에서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ᆢ유진우는 정말 현실의 '정희주'를 사랑했을까? 동생 세주가 기타 연주자인 누나 희주가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연주하는 모습을 게임 속에 구현한 '엠마'의 신비로움에 빠진 건 아닐까? 실제로 희주는, 가난한 모텔 운영자에 불과할 뿐이고, 그런 그녀를 이상화한 모습이 바로 엠마이니까.


유진우는 아마 영원히 게임 속에서 엠마와 함께 행복한 천국을 누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ᆢ 나는 왠지 그에게 이 말을 해주고 싶다.


"천국이란, 사실은, 아주 지루한 지옥을 미화한 걸지도 모르죠. 나라면, 백전백승의 최고 레벨, 게임 속 최후 보스가 되어서 수만 명의 도전자들을 받아내는 것보다는 현실에서 매일 다른 게임을 해보는 걸 택하겠어요. 매번 레벨 1에서 시작하더라도 말이죠.


어떤 일이 생기고,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 상상하는 것. 그게 나의 천국이거든요."


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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