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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삶-14

14. 평행우주의 순진

by 아스트랄

"밑면의 반지름의 길이가ᆢ내접하는 직육면체의 높이가ᆢ일 때 최대가 되는 넓이는?"


저거 지난번 모의고사 문제 완전 단순변형이잖아. 홍쌤 실력이 저 정도지 뭐ᆢ 그래도 나름 노력은 했네.


왼손으로 턱을 고이고, 오른손에 샤프를 까딱이면서 나는 심드렁하게 수학 수업을 듣는 중이다.

아. 학원이냐고? 그럴 리가. 학원 수업을 이렇게 들었다간 1등급에서 미끄러지지. 나는 엄마가 일 년 전부터 정재계 지인 찬스로 넣어준 소수정예 학원에 다니는 중이다.


그리고 지금은 학교. 점심시간 후 5교시다. 보통 국영수는 학생들 잘 까봐 오전수업으로 시간표를 짜주는데 뭐. 수업계 샘도 한계가 있겠지.

나는 저 정도 문제들이야 풀 가치도 없지만, 그래도 생기부(학생생활기록부) 과세특(과목별 세부능력특기사항)에


'지오지브라(알지오매쓰)를 이용하여 조선시대 토지개량법을 분석한ᆢ '


뭐 그런 문구가 쓰이려면 적어도 안 자는 척, 딴짓 안 하고 열심히 듣는 척은 해야 한다. 안 그랬다가는

수학선생님이


'저놈 성적은 다 학원빨에 부모빨이라 대놓고 선생을 무시하네ᆢ'


하고 생각해서 괘씸죄에 걸려 500바이트 이상 기재사항이 깎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순진'. 존스홉킨스대 출신으로 지금은 카이스트 교수이며 미생물학의 권위자, 구독자수 오백만을 넘는 유튜버이신 '강덕구'님의 첫째딸이다.


아. 혹시 오해할까 봐 하는 말인데. 강덕구는 우리 엄마 이름이다. 어? 너 강 씨 아니었어?라고 할까 봐 다시 한번 말하는데, 나는 엄마 성을 선택했다.


우리 아빠 성은 김 씨고, 가정주부다. 젊은 시절부터 외모를 잘 가꿔서 잘생기셨고 건강관리도 잘하셨고, 일찌감치 '취집'하겠다는 신념으로 같은 대학에서 공부하던 수재였던 엄마를 잘 잡아서, 지금은 훌륭히 가사를 돌보고 재테크를 하고 육아(나와 동생 순선이)를 하고 계신다. 나는 우리 엄마와 아빠를 모두 존경한다.


이렇게 철저히 이과생으로 미국 유수의 약대에 진학하여, 제약회사 연구원으로 개발도상국에 가서 많은 사람을 살리는 의약품을 개발하여 보급하겠다는 꿈을 가진 나에게, 어느 날 갑자가 같은 반 '최정의'가 보이기 시작했다.


정확하게는, 최정의가 지난번 중간고사 수학시험 답안지에 기둥을 세우고 나서, 화장실 안에서 훌쩍거리던 소리를 들은 날이다.


내게는 너무 쉬운 문제들인데ᆢ누군가는 그 문제들을 풀지 못해서, 겨우 17살의 나이에 인생의 절망을 느껴야만 한다는 걸. 나는 그때까지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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