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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하린 Mar 13. 2024

발레리나

제 취미는 발레입니다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발레 학원 등록하기였다.

사실 아주 어렸을 때 짧지만 발레를 했었다. 전공을 하려고 했지만 부모님의 반대와 더불어 너무 어려 스스로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잘 몰랐던, 그저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였던 나는 그렇게 발레를 그만두었다. 

발레를 포기한 그날, 방에서 혼자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제 발레가 아닌 공부를 택한 만큼 열심히 해서 꼭 성공할 것이라고 믿었던 그 순수하면서도 슬픈 다짐까지도. 그때 내 나이는 고작 11살이었다. 

11살, 지금 생각해 보면 무엇이든 될 수 있었던 나이. 무엇이든 꿈꿀 수 있었던 나이. 나는 왜 그 어린 나이부터 포기하는 법을 배워야 했을까. 세상은 처음부터 내게 친절하지 않았다. 


그렇게 잊고 살다가 23살이 되어서야 13년 만에 다시 시작한 발레는 여전히 설레고, 여전히 벅찼다. 더 이상 어린 시절의 친구들 사이의 어설픈 견제나 늦게까지 남아 삼각김밥으로 저녁을 때우며 연습을 하거나 몰래 간식을 먹거나 하는 일은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리운 추억의 향기가 났다. 탈의실에 들어가면 발레 타이즈와 슈즈에서 나는 특유의 묵직한 분 냄새가 난 여전히 참 좋더라고. 


잠시 고민도 했다. 다시 발레로 대학원을 가서 이쪽으로 진로를 바꿔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할 정도로 여전히 좋았고, 재능이 있어서. 잘하는 걸 좋아하게 되고, 좋아하니까 더 열심히 하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럼에도 나는 발레를 그저 영원한 꿈으로 간직하려 한다. 첫사랑을 굳이 다시 만나지 않고 아름다웠던 그 기억 그대로 간직하듯이. 내게 발레는 영원히 '행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그 행복이 어느 순간부터 변질되길 원치 않는다. 아니, 어쩌면 이런 건 다 핑계일지도. 나는 이제 정말로 현실이라는 큰 벽을 홀로 마주해야 하는 어른이 되었고 지금까지 발레를 잊은 후 선택하고 걸어왔던 또 다른 길 위에 내가 쌓아온 모든 것들을 여기에 두고 돌아설 자신이 없어서. 그러기엔 이미 내게 소중하고 너무 아까운 것들이 되어버려서. 


난 여전히 발레가 좋다. 그 백조처럼 우아한 몸짓과 그 속에서 수도 없이 헤엄치는 상처투성이 발이 좋다. 사람들은 그 우아하고 아름다운 춤을 보며 그 밑에 어떤 피나는 노력을 하는지는 전혀 알지 못하는 점도. 스스로에게 더 혹독하고 잔인해질수록 타인에겐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점도 말이다. 끝까지 아름다운 춤을 추며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순간에도 품위를 잃지 않는 발레의 우아한 고독함이, 자신의 속마음은 어떻든 남들에게 항상 완벽해 보이길 바랐던 나의 오랜 습관과도 닮아 있는 것 같아서. 그날의 순수하면서도 슬픈 다짐을 닮아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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