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앓아오던 병처럼 봄이 깊어졌다
나무는 제 몸을 부지런히 떨어대며 겨울을 벗어낸다
그리하여 끝끝내 지난 계절에 품었던 것을 모두 놓고
텅 빈 하늘을 향해 하얀 속살을 드러낸다
바람은 끈적이는 혓바닥을 길게 늘어뜨리고
속살을 핥으며 나뭇가지를 지나는 사람에게 가닿아
축축하고 질펀한 입김 한 움큼을 불어 날리고는
그제야 다시 몸을 풀고 있는 땅 위를 걷는다
이따금씩은 등을 떠밀기도 하고
이따금씩은 얼굴을 감싸 안기도 한다
누구도 쉽게 외로움을 벗지 않는다
그것은 어느 누구의 탓도 아니고
어느 누구의 위로로 덜어낼 수도 없다
나는 그날 죽어가는 길 위를 걸었다
땅을 밟고 있다는 것은 거짓이었다
나는 낙엽을 밟았다, 겨울처럼 숨죽인 낙엽을
오래된 이름을 하나하나 지웠다
그동안에도 봄은 오고 있었으나
봄이 오는 소리는 서두르지 않는다
저녁공기에도 스며있는 봄의 냄새가 있다
그러니 성급하게 재촉하지 않아도 된다
봄은 항상 제시간에 그 길을 지난다
길 위에서 나는, 내 안에 살던 사람을 죽였다
낡은 시집을 덮듯 씁쓸하게도 겨울을 죽였다
더 이상은 외우지 못할 구절을 밀어내고 말았다
봄이 오고 난 후에도 두세 차례 눈이 내린다
눈은 조용히 지난겨울, 나의 흔적을 덮는다
낙엽과 죽어간 길과 내가 죽인 그의 발자국이
하나씩 하나씩 눈과 함께 지워져 간다
나는 잠시 멈추어 섰다
겨울이 사라지고 사람도 사라지고
고요만이 남은 정적 속에서 봄이 깊어간다
나는 언젠가, 이름도 모르는 들꽃 한 송이가
낙엽 덮인 길가에서 조심스레 피어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때, 다시 이 길을 마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