晩秋懷古 (만추회고)
風盡紅衣落 (풍진홍의락)
天寒舊夢稀 (천한구몽희)
一枝殘照裏 (일지잔조리)
猶憶少年時 (유억소년시)
바람이 다하니 붉은 옷도 떨어지고
하늘이 차가워지니 옛 꿈도 다하는구나
한 줄기 저녁빛이 드리우는데
나는 아직 그 어린 시절을 그린다
바람이 멎은 들녘 위로 낙엽이 쓸려간다. 늦가을의 공기는 맑고 차다. 그 속엔 오래된 향기처럼, 한때의 나를 불러내는 서늘한 기억이 숨어 있다.
문득 바람이 그치자, 나도 모르게 멈춰 서서 생각했다. 바람이 멈춘 자리에 남는 것은 언제나 시간의 잔해들이다.
붉은 옷이 떨어진다. 세상의 빛이 서서히 가라앉는 저녁이다. 한때 붉게 타오르던 마음도, 젊음의 격정도, 낙엽처럼 바람에 흩어진다. 그렇게 사람은 계절을 지나며 자신이 흘려보낸 뜨거운 것들을 하나씩 잃는다.
그러나, 잃는 일은 단순한 소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남은 자리를 채우는 일, 사라진 것의 무게로 살아 있는 자신을 다시 느끼는 일이다.
하늘이 차가워지니 옛 꿈도 다한다. 오래전, 꾸었던 꿈들은 이제 손끝에서 부서지는 먼지처럼 희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때때로 그 꿈들의 가장자리를 더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한 줄기 저녁빛 속에서, 그 빛이 내게 남긴 그림자를 자주 따라간다. 그곳에는 늘 앳된 소년의 얼굴이 있다.
그 소년은 언제나 바람 속에 있었다. 더 멀리 가고 싶어 했고, 세상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가 떠나온 길을 되짚으며 묻는다. 그토록 간절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시간은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붉은 노을이 스러지는 하늘 아래, 잎새가 떨어지는 소리만이 오래된 질문처럼 울린다.
만추의 저녁은 그래서 슬프고도 아름답다. 사라짐이 완성되는 시간, 그리고 기억이 한 줄기 빛으로 남는 순간. 나는 여전히 그 소년을 그리워하지만, 그리움이란 돌아가려는 마음이 아니다. 다만, 그때의 빛을 오늘의 어둠 속에서 이따금씩 다시 불러보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
바람이 멎고, 낙엽이 다 진 자리에서 자주 되뇌고, 그 한 마디가 저녁빛처럼 마음 깊은 곳에 오래 머문다.
“그래, 나는 아직도 그때 그 어린 시절을 그리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