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로 가는 길에 신호운이 좋았다. 보행신호의 막힘이 없이 걸었고 초록불이 뜬 횡단보도 앞에서 버스가 직진 신호를 대기하고 있었다. 버스를 스쳐 지나며 정류장을 향해 갔다. 불운한 일이 있으면 그만큼 행복한 일도 찾아온다는 숱하게 떠도는 법칙이 아예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닌가 싶었다. 이 정도의 행운은 아침에 겪은 불행에 비하면 극히 적은 일이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할 수 있을 정도로 기분을 올려주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버스 안에 사람들이 점점 가득 찼다. 이 많은 사람들은 어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안고 살아갈지 궁금해졌다. 무표정 안에서 어떤 말 못 할 고민 혹은 비밀, 검은 속내, 아니면 기대와 설렘이 정신없이 떠돌고 있을까. 나만큼 불행한 사람이 이 버스 안에는 몇 명이나 될까. 누가 봐도 평범하고 고요한 삶을 사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 사람의 영혼으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왜 나는 지금 이 시간, 이 버스의 중간 2인석 자리 왼편에 앉은 김해원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나의 출생은 내가 택할 수 없던 일이었음에도 이 생을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를 대체 어디서 찾아야 할지 더 깊은 고민으로 빠지기 전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생각에는 자성이 있는 듯하다. 자석 같은 생각들이 서로를 끌어당겨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다란 덩어리로 엉겨 붙으면 속이 꽉 막혀 소리를 꽥 지르고 싶은 충동이 생기기 때문에 잘라내야만 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회사로 가는 길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가만히 서있는데 드라마 세트장 같은 풍경이 내 옆을 지나 뒤로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거리의 사람들도 엑스트라 단역들이 일부러 나를 모르는 척하며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눈을 감고 뜨면 바로 퇴근 시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면 다시 안정을 찾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을 온전히 마주하고 받아들일 것을 생각하니 억겁의 시간으로 느껴졌기에 할 수만 있다면 이 시간을 잘라서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두고 싶었다. 후 하고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다. 사무실의 공기가 낯설었다. 동료들도 어딘가 달라 보였다. 오늘따라 다들 생기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혹시 나와 같은 꿈을 꾸었나? 순간 생각했다. 순간의 상상을 깨주는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임님, 일찍 오셨네요!"
이루리 씨였다. 하얗다 못해 투명한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보다면 푸르스름한 모세혈관이 턱 부근에 여러 가닥으로 갈라져 있다. 동양미 넘치는 매력적인 외꺼풀의 눈이 사람을 묘하게 홀린다. 높은 코는 아니지만 얇고 길게 뻗은 콧대와 그 아래 콧볼살이 별로 없어 세련된 인상을 풍긴다. 그리고 갸름한 턱. 아마 이 턱이 아니었으면 촌스러운 얼굴이 되었을 것이다. 그녀의 외모는 전형적으로 예쁘지 않지만 어디서나 눈에 띄는 얼굴이다. 여자든 남자든 힐끗하며 몰래 훔쳐보게 되는 그런 외모다. 이름마저 평범하지 않다. 부모님께서 하고 싶은 것은 다 이루고 살라며 지어주신 이름이라고 했다. 이름에서부터 부모님이 얼마나 딸을 사랑하고 지지하고 응원하는지 느껴진다. 그녀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일까? 다 가져도 공허한 마음은 똑같다는데 그녀도 그렇게 느낄까? 이루리 씨를 보면 가끔 드는 생각이다.
이루리 씨의 밝은 인사가 오늘은 유독 기분에 거슬렸다. 노력없이 가진 듯한 그녀의 것들. 그늘이 없는 환한 얼굴, 누구에게나 애교스러운 말투와 붙임성, 호기심이 어릴 때마다 물기가 차는 눈동자, 이것들을 종합하면 그녀는 티없이 맑은 사람이다. 그런 그녀의 인사가 오늘은 유난히 달갑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