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씨스타 19)
이제는 조금 옛날 노래라고 할 만한 씨스타 19의 ‘있다 없으니까’ 중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니가 있다 없으니까 숨을 쉴 수 없어. 곁에 없으니까 머물 수도 없어.’
-씨스타 19, 있다 없으니까-
갑자기 10년도 더 된 노래를 들고 와서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2024년 여름 직전,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더워 죽겠다.’
올여름은 생각보다 늦게 와서 그렇게 더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40명이 넘는 사람을 한 공간에 넣어 놓았고 여름을 앞둔 시기였으니 더운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사실 강의실이 이렇게 더운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앞서 언급한 수업을 듣기 2주쯤 전에 학교 측에서 공지가 올라왔다. 긴 공지였지만 가장 중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에어컨은 5월 27일부터 가동합니다.’
이 공지를 보고 친구들과 온갖 욕을 해댔다.
“야, 미친 거 아냐?”
“이러다 타 죽는다.”
“등록금 어디 갔냐?”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 사실 여름에 에어컨 가동 기간이 공지가 될 때마다 작년에도, 4년 전에도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항상 에어컨을 너무 늦게 튼다며 구시렁거렸다.
그렇게 과거의 기억을 되짚던 중, 분명 내가 살아왔었던 시기가 어렴풋이 생각났다.
당신은 어렸을 적 집에 에어컨이 있었는가?
내가 8~9살이었을 때에는 집에 에어컨이 없었던 것 같다. 당시 다니던 초등학교에도 에어컨은 없었다. 그저 켜면 천장에서 원을 그리며 돌아가는 4~6대의 선풍기가 있었을 뿐이다. 친구들과 서로 선풍기 바람을 맞기 위해 선풍기가 도는 방향을 따라 움직이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그땐 에어컨이 없었어도 잘 살았다. 기억이 희미하지만 적어도 더워서 아무것도 하기 싫고, 잠을 못 자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나는 지금 외부 온도가 30도만 넘어가도 밖에 거의 나가지 않는다. 꼭 나가야 한다면 외부에 노출되는 시간을 최대한 줄인다.
요즘 대학생들이 자취할 때 많이 찾는 원룸, 혹은 오피스텔, 심지어 단칸방인 고시원에서도 에어컨은 기본 옵션인 경우가 많다. 이렇게 에어컨은 우리가 사는 데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 잡았다.
당신은 에어컨 없이 살 수 있는가? 일단 나에게 그 질문을 한다면, 나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다고 답할 것이다.
이건 사실 좀 이상하다. 우리는 분명 에어컨이 없던 시절을 살아왔다.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모르지만, 꼭 당신이 아니어도 우리가 살아왔던 시대의 과거를 산 사람들은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 그 사람들은 분명 에어컨이 없는 시대를 살았고, 우리에게 에어컨이 있는 시대를 선물해 주며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사람들처럼 우리 또한 에어컨 없이도 잘 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당신도 알듯이 그건 쉽지 않다. 이를 ‘역체감’이라고 하기도 한다. 역체감의 예시는 정말 많다.
예를 들어, 게임을 좀 하는 사람이라면 모니터의 ‘주사율’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쓸 것이다. 모니터의 주사율이란, 영화나 동영상의 ‘프레임’과 비슷한 개념이다. 모니터는 화면에 보이는 영상이나 그에 준하는 것을 사진으로 아주 빠르게 보여준다. 이론상 인간은 초당 24개의 사진을 본다면 영상으로 인식한다고 한다. 초당 송출되는 사진의 개수를 ‘FPS’라고 한다.
아무튼, 나는 모니터의 FPS 제한이 60이면 게임을 하지 못한다. 처음 게임을 할 때는 60 FPS 모니터에서도 불편함 없이 했지만, PC방의 컴퓨터 사양이 좋아지면서 144 FPS로 게임을 하다가 보니까, 이제는 60 FPS 모니터에선 화면이 버벅거리는 게 눈에 보여서 게임을 하지 못한다.
이런 것도 앞서 말했던 ‘역체감’의 일환이다.
다시 에어컨 이야기로 돌아와서, 에어컨 속의 사는 우리는 온실 속의 화초 그 자체가 아닐까? 아니, 말 그대로 ‘에어컨 속의 인간’이라고 표현해도 이제는 얼추 뜻이 맞을 듯하다.
이제 처음에 옛날 노래를 꺼내면서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를 알겠는가?
우리는 없다가 있는 것은 괜찮지만, 있다가 없는 것은 견디지 못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런 인간의 특성은 우리의 ‘이기적 유전자’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언급한 이기적 유전자는 리처드 도킨스의 베스트셀러인 이기적 유전자가 아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동물이다. 인간뿐 아니라, 모든 동물, 식물, 미생물까지도 이기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인간은 이들 중에서는 가장 이타적인 존재이다.
아무튼,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심이 있기 때문에 타인의 것을 부러워하고, 원한다. 꼭 타인의 것이 아니어도 더 많은 돈, 더 많은 경험과 같은 것들을 열망한다.
하지만 우리는 나의 것이 아닌 새로운 것에 대해서 느끼는 열망은 보통 이성이 통제하는 범위 내부에 있다.
만약 당신의 지인이 복권에 당첨된 것을 보았다고 해보자. 그러면 정말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을까? 그 사람을 죽여서 뺏고 싶을까?
아마도 그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친구가 당신의 지갑에 있는 10만 원을 말도 없이 빼서 썼다고 해보자. 그러면 아마 그 친구와 연을 끊겠다고 난리 치지 않을까?
이렇듯 우리는 본인의 소유에 있는 것이 없어지는 것을 극단적으로 싫어한다. 복권과 10만 원의 가치 차이는 거의 1000배에 육박하지만, 가치 차이를 넘어서서 고작 10만 원에 분개할 정도로 우리에게는 ‘소유권’이 중요한 요소이다.
앞서 이야기한 역체감, 에어컨 등도 이런 것들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런 것들은 ‘적응’의 분야이기는 하지만 속성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무엇이든 이미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던 것을 빼앗긴다는 건 정말 큰 상실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 우리가 가진 것에 안주할 필요는 없지만, 소중하게는 여겨야 할 것 같다. 이런 말이 있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마라.’
익숙함에 속는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상실은 친구가 훔쳐간 10만 원보다 훨씬 무겁게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