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8일, 엄마가 항암 치료를 중단하고 6일째 되는 날 저녁, 우리 가족은 엄마의 연명치료를 거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병원에서 가족들과 의논해 보라고 한지 몇 시간 만이었죠. 우리 가족이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의견을 통일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어요.
2022년 8월, 엄마가 장출혈로 응급실을 통해 처음으로 긴 입원을 했어요. 당시에 엄마는 3주 넘는 기간 동안 병동에 입원을 했고, 온몸이 탈탈 털리듯 검사를 받았죠. 이후에 엄마가 퇴원을 해서 해주셨던 이야기인데요.
그때 퇴원하기 며칠 전부터 같은 병실을 썼던 옆 환자분도 엄마와 같은 폐암 4기였다고 해요. 엄마와 비슷한 나이에 여자분이셔서, 병간호를 하는 남편분들끼리도 이야기가 잘 통했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옆 환자분은 아주 상황이 좋지 않았어요. 멀리 지방에서 서울 A 병원에 어렵게 예약을 잡아 올라왔지만 그 사이 병세가 급격히 진행되었다고 해요.
마약성 진통제와 수액을 멈추지 않고 맞고 있었음에도 옆 환자분은 극한의 통증을 느꼈고, 그 까무러치는 소리와 고통을 호소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은 같은 병실을 쓰고 있던 엄마와 아빠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죠.
병원에서는 엄마와 아빠에게 불편하시면 다른 병실로 옮겨주겠다고 했지만, 엄마, 아빠는 남의 일 같지 않은 마음에 괜찮다고 했답니다.
그렇게 옆 환자분의 병세가 심상치 않았던 하루 이틀이 지나고, 주치의는 임종 면회를 진행해야 하니 가족들에게 연락하라고 했다고 해요. 그러고는 옆 환자분의 남편이 엄마 아빠에게 찾아와 양해를 구하셨다고 합니다.
"아들딸이 와서
엄마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는
임종 면회를 진행해야 해요.
애들이 많이 울 수도 있어,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엄마 아빠는 알겠다고, 걱정하지 마시고 편히 진행하시라고 대답하고는 병실을 나와 두어 시간 산책을 하고 휴게실에서 시간을 보내셨다고 해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무거운 마음에 두 분도 별말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엄마는 퇴원을 하셨고, 옆 환자분, 남편과는 간단히 인사를 하고 나오셨다고 하셨죠.
엄마는 그때 말기 암 환자 통증에 대해 정말 큰 두려움을 가지게 되셨어요.
"어떻게든 이 병을 이겨내리라!"라고 의지를 다지던 엄마를 처음으로 주춤하게 했던 것 같아요.
엄마는 "모든 것을 집중해서 내 몸 안에 암세포를 박멸시키겠다"라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나도 나중이 되면...
그렇게 아플까?
그렇게 아프면...
정말 죽는 게 나을 것 같았어...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지켜보기 힘들 정도였어..."
엄마의 마음 약한 소리를 들은 저는 엄마를 안심시키려고 큰소리를 쳤어요.
"엄마 지금 치료 잘 되고 있는데 왜 그런 걱정을 하고 그래" 하면서요.
지금은 좋은 생각만 하시라고 했죠.
그리고 혹시라도 나중에 그런 일이 생기게 되면,
"우리가 엄마 꼭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할게" 하며 엄마에게 약속했어요.
통증에 대한 두려움은 엄마가 아빠에게도 종종 얘기하셨다고 해요. 그때 같이 병실에 있었던 아빠도 엄마의 마지막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해 오셨었고요.
많은 가족들이 연명치료 선택의 순간에 고민하고, 혼란스러워한다고 해요. 그래서 연명치료 중단이 늦어지기도 하고, 가족들끼리 갈등이 깊어지기도 한데요. 혹시 모르는 그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서 그렇겠죠.
저와 가족들은 엄마의 병기와 많은 바이탈 사인이 거스를 수 없는 임종기(한 달 가까이 제대로 식사를 하시지 못했고, 수면시간이 활동시간보다 월등히 길어지고 있었어요)에 접어들었다 판단했고, 엄마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통증을 겪게 하지 않고 싶었어요.
그리고 가장 중요했던, 엄마의 마지막 순간을 가족이 함께 따뜻하게 해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연명치료를 거부하기로 했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