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암 4기 엄마가 항암을 중단하고 6일째 되던 날, 24년 1월 8일 월요일은 서울 A 병원에 입원이 예정되어 있었어요. 병원 안내 문자에는 오후 3시 이후에 오라고 되어있었지만, 엄마는 한사코 훨씬 일찍 가야 한다고 하셨어요.
집에서 정말 아침과 점심을 대충 먹고, 엄마의 식사(쌀가루 죽과 딸기)를 챙겨드렸어요. 엄마는 스스로 병원에 갈 옷과 신발, 가방을 고르고 저에게 도와달라고 하셨죠. 아기처럼 누워있는 엄마의 옷을 입혀드린 것은 처음이었어요.
아빠는 그간 엄마의 입원을 몇 번 함께 하며 병원 짐 챙기는 데에는 도사가 되었다며 빠른 속도로 짐을 꾸렸어요.
폐암 4기 엄마가 항암을 시작하고 1년 반이 넘는 동안 이 모든 일들을 아빠에게만 맡겨두었구나 싶어 마음이 무거웠어요. 아빠는 최근 한 달 사이 엄마가 어지러움으로 거동이 불편해져서 그렇지, 그전에는 전혀 힘들지 않았다며, 웃으셨죠.
정말 어렵게 침대에서 바로 휠체어를 타고 차로 이동했어요. 아빠는 운전하는 한 시간 남짓 내내 엄마 손을 꼭 잡으시고, 이제 곧 병원에 도착할 테니 조금만 참으라고, 병원에 도착하면 의사 선생님들이 도와주실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하셨어요.
병원에 도착해서, 주차를 하고 아빠께 엄마와 간단한 짐을 챙겨 입원 수속을 먼저 하시라고 했어요. 남편과 딸아이와 함께 기다리고 있을 테니, 엄마가 조금 안정을 찾게 되면 그때 아빠께 짐도 전달해 드리고, 같이 식사도 같이 하기로 했죠.
코로나 이후 서울 A 병원은 상주 보호자 1인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어 다른 가족들은 병원 로비 안으로 아예 들어갈 수 없었어요.
입원 수속을 마치고 병실로 이동하는 아빠와 엄마를 1층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만났어요. 로비와 병원 내부를 구분하는 난간이 높이 쳐져 있어서, 아빠가 정말 기분이 이상하다 하셨어요. 엄마에게 잘 치료받고 집에서 만나자고, 주말에 다시 엄마 집에 가겠다고 하는데 엄마가 말했어요.
"김서방, 정말 고마워!"
남편은 나중에 엄마가 이날 정말 고마우셨던 것 같다며 이야기했어요. 엄마가 가족들에게는 표현이 많았던 분이 아니었거든요.
그런 엄마도 손녀에게만은 예외였죠. 엄마는 딸아이와 "사랑해!"를 외치며 손을 꼭 잡고 인사했어요.
이때가 남편과 딸아이는 엄마와의 마지막 순간이었어요. 마지막일 줄 알았으면 더 제대로 인사할 걸 그랬다며 딸아이는 두고두고 아쉬워했어요. 우리가 그렇게 모르고 흘려보내는 마지막 순간들이 정말 많겠죠.
그렇게 엄마와 아빠는 입원실로 올라가고, 병원에서 한두 시간 아빠의 연락을 기다렸어요. 입원해서 엄마가 수액이라도 맞게 되면, 아빠가 한숨 돌리실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죠. 엄마도 엄마지만, 사실 아빠의 체력과 건강도 염려스러웠거든요.
"딸아, 아무래도 안될 것 같다.
우선 짐만 받아서 들어가야겠어.
너희도 어서 집에 가라."
아빠의 목소리가 조금 초조했어요. 잠깐 밥 먹을 틈도 없으신 건가... 주차장에서 만나 정말 짐만 챙겨서 바로 들어가려 하시더라고요. 엄마는 어떤지 물어보니 의료진들이 계속 왔다 갔다 하고, 계속 보호자를 찾아서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고 하셨어요.
사실 이때부터 뭔가 기분이 아주 쎄 했어요.
아빠와 병원 주차장에서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남편과 딸아이와 집으로 돌아왔어요. 며칠 만에 돌아온 집에서는 허전함을 넘어 휑한 기분까지 들었어요.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기에 저녁을 먹고 남편과 저는 다음 날 출근 준비를 하고, 딸아이는 과제를 하고 있었죠. 저녁 8시 아빠에게 전화가 왔어요.
"딸, 통화 괜찮지?
방금 의사 선생님과 면담을 하고 왔다.
가능하면 스피커폰으로
김서방도 들으면 좋겠다."
차분하지만, 떨리는 아빠의 음성이 그대로 전해졌어요. 스피커폰으로 기능을 설정하고, 딸아이와 셋이 나란히 앉았어요. 사실 남편도 같이 들으면 좋겠다는 아빠의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어요. 심상치 않은 내용이구나.
"엄마가 생각보다 많이 아프다.
병실에 올라오자마자,
간단한 검사들을 진행했고,
모든 검사 결과가 좋지 않아.
함께 의논해야 할 것이 있어."
우리가 생각하고 마음으로 준비했던 것보다 엄마의 상태는 더 나빴어요. 엄마는 왼쪽 폐에 물이 가득 찬 상태였어요. 병실에 올라가자마자 주사기로 1리터가 넘는 물을 빼냈고, 우리는 엄마가 자꾸 왼쪽으로 돌아누웠던 이유를 그제야 알았죠. 왼쪽으로만 돌아누워 이미 왼쪽 허벅지에는 욕창이 심한 상태였고, 다른 장기들도 속수무책으로 망가지기 있었고 출혈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였어요.
면담을 진행한 의사는 아빠에게 현재 엄마의 뇌와 심장만 멀쩡한 상태라고 설명했어요. 아마 오늘 입원하지 않으셨다면, 집에서 돌아가셨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러고는 아빠에게 가족들과 연명치료에 대해 의논해 보시라고 했다네요. 의사의 소견대로라면, 엄마는 더 급속도로 나빠질 것이고, 통증이 극심해질 수도 있어 중환자실이나 집중치료실로 옮겨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어요. 엄마에게 할 수 있는 치료를 끝까지 해볼 것인지, 연명치료를 거부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었어요. 이런 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도 속상했지만, 가장 걱정되는 건 아빠였어요.
그래서 가장 먼저, 아빠에게 의견을 물었어요. 아빠는 어떻게 하고 싶은지...
"나야 당연히...
하루라도 더 엄마랑 살고 싶지...
그런데 딸...
엄마가 너무 아파해..."
아빠의 대답을 듣고 한참을 그냥 엉엉 울었던 것 같아요. 끝을 알고 있는 우리의 대화가 너무 서글펐어요. 어떤 선택을 해도 엄마는 이제 곧 우리 곁을 떠나겠구나 싶었거든요. 아빠가 다른 가족들과도 의논해 보겠다고 전화를 끊었어요.
남편은 저에게 "장모님이 중환자실에 가게 되면 정말 춥고, 기계음 밖에 안 들리고, 외로우실 거예요. 하루에 5분 면회가 되는데, 며칠이 될지도 모르는 그 보호자 생활을 장인어른 체력이 감당하실 수 없을 거고요"라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했어요.
슬픔의 깊이와 너비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눈물이 멈추지 않았고, 정신이 없었지만, 그래도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싶었어요.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고 있는 엄마의 병세를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은 분명했고, 의미 없는 연명치료로 엄마와 아빠를 더 힘들게 해드리고 싶지 않았어요.
늘 조언을 구하던 동네병원 원장님은 중환자실과 연명치료를 정말 적극적으로 말리셨어요. 절대로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그동안 치료받느라 고생 많았는데, 마지막은 가족들 품에서 따뜻하게 떠날 수 있게 해야 한다면서요.
잘하는 선택일까 하며 조금이나마 흔들리던 마음을 원장님 덕분에 다잡을 수 있었죠.
그렇게 엄마가 항암 치료를 중단하고 6일째 되는 날 저녁, 우리 가족은 엄마의 연명치료를 거부하기로 결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