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고3 여름, 난 아빠가 살이 빠졌다고 좋아했었다

19살, 49살이 마주한 췌장암 2기

by 흔들리는촛불

19살 여름방학 때, 나는 학교에 있었다.

특목고 특성상 방학이 되어도 거의 98%의 학생들이 모두 학교에 남아 자습을 하거나 방학수업들을 듣고 있었다. 2% 정도는 그 당시 논술학원이나 별도 학원을 다니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던 것 같다. 집이 학교와 먼 도시에 있는 학생들은 그 지역에 사는 학생들끼리 대형 버스를 대절해서 2주에 한 번씩 함께 집에 가곤 했다.집에 가는 날이 다가오면 다들 어떤 간식들을 사서 올까 하면서 설레어하곤 했고 몇몇은 그동안 열심히 입었던 옷들을 집에 던지고 올 궁리, 그다음 계절의 옷들을 미리 한아름 챙겨 올 생각만 하며 나름 모두가 자기 머릿속에 그 귀한 휴가를 계획하고 있었다.


학교에 있으면서 핸드폰이 없다 보니 점심시간만 되면 통화부스 앞에 1~3학년들이 모두 가족들과 잠깐의 통화라도 하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3학년이 되면 좋은 점은 우선 수능이 다가워지는 만큼 모든 선생님들이 좀 더 인자해지신다는 점과 그다음으로는 점심시간에 타 학년들보다 먼저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점심을 가장 일찍 먹다 보니 통화부스를 선점할 수 있었고 여유롭게 통화를 하는 3학년들을 1학년은 점심을 먹기 위해 뛰어가며 은근히 부러운 눈빛을 비췄다. 본래 집에 자주 통화를 하는 성격이어서 그날도 어김없이 통화를 했다. 그때 마침 엄마 아빠가 다투고 서로 말을 안 하고 있었던 때여서 통화를 하며 둘이 화해를 좀 하라고 말할 참이었다.


전화를 받은 엄마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차분했다. 아빠가 소파에서 자고 있다가 몸이 좀 아픈 것 같아서 봤는데 눈이 너무 노래서 병원에 데려갔다고 말했다. 아빠가 요즘 많이 피곤했었어?라는 물음과 함께 그래도 아프니까 서로 이야기를 하는구먼~이라며 실없는 농담을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또 전화를 하니 아빠가 살이 많이 빠졌다고 했다. 예전에 잘생긴 젊은 시절의 아빠 사진들은 많이 봤기에 장난으로 ‘얼마나 잘생겼을지 기대가 된다, 그렇게 살 빼고 싶어 했는데 잘됐네’라고 하며 집에 가는 날만 기다렸다.


그렇게 집에 도착하니 아빠는 전에 72킬로였던 몸에서 65킬로로 2주 만에 거의 8킬로 정도가 빠져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젊은 시절의 잘생긴 아빠보다는 야위어 보였지만 그래도 매번 체중 때문에 우리에게 잔소리를 들었던 만큼 이번 기회에 살이 빠져서 다행이라고 했다. 그렇게 토요일 하루를 보내고 일요일 버스를 타고 다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되었을 무렵 아빠, 엄마, 동생이 모두 거실에 둘러앉아 잠시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동생은 소파에 누워 별 관심이 없다는 듯이 있었고 엄마 아빠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거실에서 나를 불렀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00아 아빠가 사실 살이 많이 빠졌잖아. 그런데 그게 아빠가 췌장암 2기래 ”


그 말을 듣자마자 머릿속으로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울음이 터져 나왔다. 머리는 아직 내용을 받아들이지도, 이해하지도 못했지만 직감적으로 ‘죽음’이 다가온다는 두려움을 느꼈는지 울음이 먼저 터져 나왔다.

“그거 완치도 안 되는 병이잖아. 그거 암중에서도 사망률이 높은 거잖아 ‘라고 하며 화가 난 듯 약간 울분이 섞인 목소리로 울었다. 화가 나기도 했다.

신에 대한 원망 이런 것보다 아무것도 모르고 살이 빠졌다고 좋아라 한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멍청해 보였다.


동생은 그때에도 그냥 누워서 모든 걸 마치 관심이 없다는 듯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엄마 아빠가 넌 아무렇지 않냐고 신기하듯 물어보자 동생은 사실 알고 있었노라고 말했다. 약 2주의 시간 동안 엄마와 아빠는 집에서 서로 내색을 하지는 않았겠지만 진지한 어조로 서로를 걱정하였을 테고 동생은 그 모든 걸 감히 이유는 묻지 않은 채 조용히 직감하고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 돌이켜보니 동생은 나보다 3살이나 더 어렸고 학년으로는 빠른 년생이라 두 학년 차이가 나서 고등학교 1학년밖에 안 된 어린 학생이었다. 그런데 아빠가 회사를 가지 않고 며칠을 계속 병원만 왔다 갔다 하면서 엄마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혼자 얼마나 두려웠을까 하는 생각이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든다.


그렇게 아빠는 췌장암이었다는 통보를 받고 혼자 방에 들어가서 ‘췌장암 2기, 췌장암 생존율, 췌장암 완치’를 수십 번이나 네이버창에 쳐보았다. 그중 아버지의 췌장암 항암 일지를 쓴 아드님의 블로그가 있었다. 수많은 글들 중 항암일지의 중간 글을 먼저 읽었던 터라 열심히 스크롤을 하며 가장 마지막 글을 찾았다. 그리고 그 글은 아버지께서 약 1년 정도의 항암치료 끝에 영면하셨다는 글이었다. 실낱같은 희망 같은 건 없었고 모든 글들은 모두 너의 아버지는 어쨌든 아마 1-2년 안에 돌아가실 거다 라며 명확한 사형집행일은 알려주지 않은 채 엉터리 사형재판을 내렸다. 나는 살이 빠진 아빠와 행복한 포옹만을 하고 다시 학교에 가고 싶었던 것뿐인데 세상은 갑자기 온통 캄캄해지고 내 손에 언제 꺼질지 모를 촛불 하나만 쥐어줬다. 그 촛불을 머리에 이고 있는 촛대가 얼마나 길지 짧을지도 모른 채 그 불꽃만 바라보라는 듯했다. 그리고 정말 이 날 이후 우리 온 가족들은 그 촛불만 바라보며 1년 반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그날 어떻게 다시 학교로 돌아갔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버스 안에서 떠들썩한 친구들의 대화소리들을 뒤로하고 혼자 커튼 뒤에서 연신 눈물을 닦고 있었다. 학교에 도착을 하면 5-6시 정도가 되었고 7시부터는 다시 전교생이 자습실에서 주말 저녁자습을 시작해야 했다. 도저히 눈, 코, 머리끝까지 눈물을 가득 머금은 상태로 자습실에 갈 수가 없어서 가장 친했던 친구를 한 명 불러서 이야기를 했다. 아빠가 췌장암이래라는 말을 내뱉자마자 얼굴 가득 차 있던 눈물들이 제어가 되지 않아 하염없이 흘러나왔고 댐의 둑문이 터지듯 입안에서도 참았던 울음소리가 나왔다. 폐의 모든 공기들이 마치 그 안까지 흘러있던 눈물들을 밀어내려 하듯 숨 가쁘게 그리고 힘차게 나 자신도 처음 듣는 울음소리들을 내뿜었다

그 소식을 듣고 우는 나를 지켜보던 친구는 처음에는 헙!하는 소리와 함께 입을 막고 난 뒤, 하염없이 날 안아 등을 두드려줬다. 그때의 나는 아무나 나를 꼭 안아주기를 바랐다. 어쭙잖은 위로나 괜찮아질 거다라는 희망 따위는 바라지 않았다. 그냥 아무나 나를 꽉 안아주고 놓아주지 않기만을 바랬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자습실에 갔다. 그 이후의 기억은 없다.


이 하루 만에 우리 집은 ‘암환자와 그의 가족들’이라고 공식적으로 공표가 되었고, 하루아침에 우리 모두에게 시간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언제 꺼질까두려운 촛불이 되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흐려질까 두려워, 글로 새겨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