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보이>부터 <어쩔수가없다>까지.
박찬욱 영화감독은 클덕(?)으로 유명하다. 예술의 전당에서 좋은 연주회가 열릴 때마다 여기저기서 목격담이 뜨는 것을 보면, 정말 클래식을 어지간히도 좋아하시는구나, 싶다.
나는 박찬욱의 영화를 굉장히 좋아한다. 특히 영화 속에서 흐르는 클래식 음악을 무척 좋아한다. 각 작품마다 작품의 색에 걸맞은 클래식 작품이 삽입되어 있어서, ‘박찬욱의 영화’를 떠올리면 그 영화에 속에서 흐르던 클래식 멜로디가 연달아 생각날 정도이다. 오직 클래식 만이 전달할 수 있는 분위기, 감정은 영화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하나의 장치가 된다.
(영화 내용 스포일러를 최대한 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그래도 스포일러 주의!!!)
올드보이(2003)
비발디_<사계> 중 ‘겨울’ 1악장
A.Vivaldi Concerto No. 4 in F minor, RV 297 "L'inverno" 1st Mov.
주인공 오대수가 박철웅을 찾아간 장면. 박철웅이 있던 방은 수감자들을 감시하는 CCTV 화면으로 가득하다. 오대수는 분노하고, 박철웅은 회피한다. 결국 매우 잔인한 방법으로 응징당하는 박철웅. 비발디의 사계 1악장은 이 긴장되는 순간을 더욱더 극적으로 만들어주었다. 툭툭 끊어지는 리듬과, 점점 심상치 않게 흘러가는 화성이 불안감과 긴장을 고조시키고, 겨울이라는 부제답게 서늘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친절한 금자씨(2005)
비발디 칸타타 <그만두어라, 모두 끝났다> RV684 中
<왜 나의 슬픔 외에는 원치 않을까>
A.Vivaldi Cantate <Cessate, omai cessate> 中 <Ah ch'infelice sempre>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던 금자는 15년간의 복역을 마치고 마침내 출소한다. 전도사가 내미는 흰 두부를 엎어 버리고, ‘너나 잘하세요’라고 말하는 금자. 이 장면을 시작으로 금자는 본격적인 복수를 위해 발걸음을 옮긴다.
이 순간 비발디의 칸타타, <그만두어라, 모두 끝났다> 중 <왜 나의 슬픔 외에는 원치 않을까>가 편곡된 형태로 흐른다. 억울함과 애달픔, 미안함, 분노 등이 뒤섞인 금자의 마음상태를 직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음악이 아닐까, 생각한다.
파가니니 카프리스 24번 1악장
N.Paganini Caprice No. 24 in A minor - Quasi presto
출소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획을 실행해 나가는 금자의 뒤로 그 유명한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선율이 울려 퍼진다. 잃을 것이 없는 금자의 굳센 마음은 차갑고 냉정한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선율과 잘 어울린다.
박쥐(2009)
바흐 칸타타 BWV82 <나는 이제 만족하나이다>
J.S.Bach Canatate BWV82 <Ich habe genug>
영화의 시작부터 흘러나오는 이 곡은 바흐의 칸타타 BWV82 <나는 이제 만족하나이다>를 편곡한 음악이다. 주인공 현상현 신부가 리코더로 자주 연주하는 곡인데, 원곡의 숭고하고 겸허한 가사와 선율이 현상현의 원래 있던 곳과, 돌아가야 할 곳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1. Aria
저는 만족하나이다.
믿든 자의 희망되시는 구세주를 저의 두 팔 안에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저는 그를 보았습니다.
저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품 안에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는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스토커(2013)
필립 글래스 <듀엣>
Philip Glass < Duet>
주인공 인디아와 삼촌 찰리의 피아노 합주 장면에 흐르는 음악이다. 이 곡을 작곡한 필립 글래스는 현대 음악계의 유명한 거장이다. 미니멀리즘 음악의 선두주자인 그는, 단순하고 간결한 선율을 반복하며 점차 발전시키는 그만의 스타일을 정립했다. 이 곡 <듀엣>에서도 그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베르디 <일 트로바토레> 中 <불꽃이 타오른다>
G.Verdi <Il Trovatore> 中 <stride la vampa>
라디오에서 얼마간 흐르는 음악이다. 후반부에도 한번 더 언급된다. <불꽃이 타오른다>는 베르디의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에 삽입된 아리아로, 이 곡과 오페라의 배경을 알면 영화를 조금 더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다.
[<일 트로바토레> 줄거리]
옛날에 백작 가문의 두 형제가 있었다. 그중 동생의 이름은 가르시아로, 무척이나 어린아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집시 노파가 가르시아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간 이후로 가르시아는 심한 열병을 앓기 시작했다. 어떤 방법을 써 보아도 낫지 않자, 그의 아버지는 집시 노파의 수작이 아닐까 의심하며 그녀를 잡아다 화형 시킨다. 그 순간, 집시 노파의 딸이었던 집시 여인 아주체나는 복수를 하기 위해 가르시아를 불 속으로 집어던졌다. 그러나 불이 꺼진 후, 그녀 곁의 친아들은 사라지고, 백작의 아들 가르시아가 곁에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한다. 아주체나는 실수로 자신의 아들을 불에 던져 넣은 것이다. 그녀는 훗날의 복수를 준비하며 가르시아에게 만리코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자신의 아들로 키운다.
음유시인이 된 만리코. 그는 아름다운 여인 레오노라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그녀를 사모하는 남자가 한 명 더 있었으니, 바로 루나 백작. 루나 백작은 자신의 연적인 만리코를 증오하여 그와 결투를 벌이고 감옥에 가두는 짓을 저지른다. 이후 집시 아주체나가 만리코를 구하려 달려오지만, 레오노라에게 뒤통수를 맞은 루나 백작은 분노에 차서 만리코를 죽인다.
그 순간 아주체나는 말한다. 만리코는 너의 동생 가르시아라고. 그녀는 드디어 복수가 완성되었다며 부르짖는다.
<불꽃이 타오른다>는 집시 여인 아주체나가 자신의 어머니가 화형 당하던 순간을 풀어내 아리아다.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에 나오는 ‘형제’에 대한 모티브가 영화 <스토커>와 비슷하게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가씨(2016)
장 필립 라모 <탕부랭>
Jean-Philippe Rameau <Tambourin>
히데코가 나이 많은 남성 귀족들 사이에서 낭독회를 하는 장면. 고상한 장소와 고상한 신분의 사람들이 모였지만 그 속은 추악하고 더럽다. 그리고 히데코에게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 곡은 바로크 시대의 유명한 프랑스 작곡가인 장 필리프 라모 Jean-Philippe Rameau 가 작곡한 곡으로, 지금은 흔치 않은 고악기, 비올라 디 감바가 쓰이는 작품이다. 비올라 디 감바의 담백하고 고상한 소리가 장면과 잘 어울린다.
모차르트 <클라리넷 5중주 2악장 라르게토>
Wolfgang Amadeus Mozart <Clarinet Quintet> K. 581v, 2nd mov.
영화의 시점이 남숙희에서 히데코로 바뀌는 순간. 이 노래가 흘러나온다. 히데코라는 인물이 가지는 분위기를 이 곡이 더욱더 살려 주는데, 특히 고달프고 외로운 분위기가 강조되는 효과가 있다.
헤어질 결심(2022)
말러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
G.Mahler Symphony No.5 4th Mov. Adagietto
서래의 남편이 등산 라이브 중 언급한 말러 교향곡 5번의 4악장. 완전히 붕괴됐다고 고백하는 장면에서도,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도 이 곡이 흐른다.
이 곡은 전설적인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루키노 비스콘티의 영화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의 OST로 쓰이면서 굉장히 유명해졌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이 곡이 흘러나오는데, 그 영화와 비슷하게 <헤어질 결심>에서도 이루어지지 못하는 운명, 죽음 등과 관련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사용된 듯하다.
어쩔수가없다(2025)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 2악장
W.A.Mozart Piano Concerto in A Major K.488 2nd Mov.
영화가 시작하면서 이 곡이 크게 울려 퍼진다. 사이좋은 가족의 모습이 화면에 비치지만, 음악은 그와 다르게 어딘가 불안하다. 이는 후에 펼쳐질 어지럽고 비극적인 이야기를 미리 암시하는 장치라고 생각할 수 있다.
협주곡 23번의 2악장은 모차르트의 협주곡 작품 중 유일하게 올림 바단조 F sharp minor로 작곡되었다. 어두운 단조로 진행되는 불안한 멜로디가 관객들을 흔들어놓기엔 충분하다.
마랭 마레의 <르 바디나주>
Marin Marais <le badinage>
영화의 엔딩. 고상하면서도 유쾌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이 곡을 작곡한 마랭 마레는 프랑스 출신의 바로크 작곡가로, 비올라 디 감바의 연주와 작곡에 특히 능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 곡 또한 비올라 디 감바로 연주되며, 콘티누오(반주 악기), 주로 류트가 함께한다.
장난, 희롱 등을 뜻하는 제목 <르 바디나주>는 박찬욱 영화 특유의 쓴웃음, 허탈함, 허무함 등과 맞닿아 있다. 관객은 이 곡이 흘러나오는 엔딩을 보며 길었던 영화를 되짚어보고 생각할 시간을 가지게 된다.
지금까지 박찬욱의 영화 속 클래식 음악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개인적으로 박찬욱 감독의 클래식 선곡을 좋아하기 때문에, 앞으로의 영화에도 클래식 음악을 많이 사용해 줬으면 한다. <어쩔수가없다> 이후의 신작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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