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를 다스리는 방법
내가 한순간에 민폐녀로 찍히게 된 건 푹푹 찌는 8월의 어느 토요일이었다.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가는 참이었고 아이들은 아파트 단지 내 북카페에 있겠다 했다. 북카페 출입을 위해 관리사무소를 들렀다. 문이 잠겨있었다. 주말에도 북카페나 헬스장 등 주민편의시설은 개방이 되기에 관리사무소 출입문에 적혀있는 전화번호로 연락을 했다.
" 안녕하세요. 북카페 이용을 하려고 하는데 사무실에 안 계셔서 연락드렸습니다. "
" 네~ 지금 세대 방문 중이라서요. 한 20분 기다리셔야 될 것 같습니다. "
" 혹시 북카페 비밀번호를 알려주시면 제가 들어갔다가 20분 후에 사무실 가서 출입대장 작성해도 될까요? "
" 그건 곤란합니다. "
" 아... 그렇겠죠? 네 우선, 알겠습니다. "
하는 수 없이 아이들은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고 혼자 도서관 주차장에 막 주차를 끝내던 그때였다.
띠링.
저장되어 있지 않는 낯선 번호에서 문자 하나가 왔다.
[ 도서관 민폐녀 ]
때마침 도서관에 도착했을 터라 내가 도서관에서 어떤 민폐행동을 했는지 기억을 더듬어 봤다. 핸드폰은 무음으로 바꿔놓고 도서관 안에서 통화한 적도 없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스팸문자인가 싶다가도 하필 도서관이라니 나의 행적을 알고 보낸 것 같기도 했다.
전화를 걸었다. 생각보다 전화를 빨리 받았다.
" 여보세요 "
" 저, 문자를 받고 전화드렸는데 혹시 어디신가요? "
" 아... 저... 아.. 그게 아니고.. 문자 잘 못 보냈습니다. "
목소리를 들어보니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 었다.
" 혹시 OO 아파트 관리사무소 직원이신가요? "
"... 네. 문자 잘못 보냈습니다. 죄송합니다. "
" 아니 그러니까 좀 전에 저랑 통화하신 분 맞으시죠? 북카페 때문에... 근데 왜 도서관민폐녀라고 문자를 보내셨나요? "
화가 나서 자꾸 언성이 높아지려는 걸 애써 누르며 물었다.
" 아니... 저, 그게... 잘못 보냈습니다. 죄송합니다. "
" 당연히 잘못 보내셨겠죠. 저한테 보내야 되는 게 아니라 도서관민폐녀라고 제 번호를 저장을 하려고 하셨겠죠. 그러다 문자를 잘못 보내셨고요. 그런데 제가 어떤 민폐짓을 했나요? "
관리사무소 직원은 내가 묻는 것과는 상관없이 계속 잘못 보냈다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내가 정말 궁금한 건 내가 어떤 민폐행동을 했는지 궁금했을 뿐인데.
" 우선 제가 도서관이라 오래 통화는 못하고 월요일 아침에 관리사무소로 가겠습니다. "
어느 부분에서 내가 민폐녀가 되었는지 곱씹어 봤다. 북카페 비밀번호를 알려주면, 이 대목에서 민폐녀가 되었나? 안된다고 해서 바로 알겠다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도서관민폐녀라는 타이틀을 받을 만한 행동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날 저녁이 되자 화가 난 마음은 가라앉았고 그 관리사무소 직원이야말로 얼마나 착잡한 심정일까 싶기도 했다. 문제를 삼고 싶지 않았지만 직접 묻고 싶었다. 내가 왜 민폐녀가 되었는지. 북카페를 자주 이용하는 나로서는 관리사무소에 갈 때마다 민폐녀의 신분이 된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날이 왔다. 모든 관리사무소 직원이 출근하는 월요일 아침.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관리사무소에 갔다. 나의 등장만으로 관리사무소 직원들의 표정과 행동은 부자연스러웠고 약속이나 하듯 갑자기 바쁘게 움직였다. 올게 왔구나 하는 표정으로 어쩐 일로 오셨냐며 물었다. 나도 질 수 없지, 아실 텐데요라고 받아쳤고 소장님은 서둘러 방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자 했다.
소장님은 매우 노련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며 본인이 더 화가 난다고 했다. 자기 같았으면 잠도 못 잤을 것 같다면서 대신 사과한다고 말했다. 숨도 안 쉬고 이야기를 하는 걸로 봐서는 연습을 했거나 래퍼의 자질이 있거나.
화를 내려고 관리사무실에 온 게 아니니 그렇게까지 화낼 필요 없다고 말씀드렸다. 내가 원하면 그 직원을 다른 아파트로 인사조치를 하겠다했다. 본인이 갑인 줄 아는 민원인을 상대하는 일이 얼마나 고되고 기운 빠지는 일인지 안다. 진상러들의 전화번호를 저장하는 일이 행운의 편지를 보낸다거나 정보를 팔아 악용을 하려는 것이 아닌 것도 안다. 그저 그들을 대처하기 전 마음을 단단히 먹고 대비하기 위한 나름의 묘책이었을 수도 있겠다 이해했다.
그 직원을 징계를 하는 것은 관리사무소 내의 규정에 따르겠지만 할 수 있다면 조용히 넘어가고 싶다고 했다. 단지 그 직원에게 나를 왜 민폐녀라고 했는지 물어보고 싶으니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소장님은 연신 고맙다고 했다. 그 고마움에는 일을 크게 키우지 않아서, 더 이상 귀찮은 일을 만들지 않게 해 주어 고맙다고 하는 것 같았다.
당사자와 만나기로 한 5시. 관리사무소 문을 열었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어떤 남자분이 책상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계셨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첫눈에 저분이구나 싶었다.
" 안녕하세요. 제가 그 도서관민폐녀입니다 "
관리사무소 분위기가 너무 침침하고 고요했다. 가볍지만 뼈 있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살려보고 싶었지만 실패했다. 애써 입꼬리를 올리려 애쓰고 있었는데 그게 그 사람 입장에선 더 섬찟했을지도 모르겠다.
" 이미 많은 사과를 받았고 지금도 몇 번을 사과를 하셨으니 이제 더 이상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저의 어떤 행동 때문에 민폐녀로 낙인이 되었는지가 궁금합니다 "
요 근래 계속 나와 비슷한 또래의 민원인 때문에 꽤 힘이 들었다 했다. 구체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그 민원인은 다른 직원들도 여럿 상대한 것 같았다. 여하튼 그날도 그 민원인이 전화를 한 줄 알았다고 했다. 본인도 왜 나와 그 악성 민원인을 동일인물로 착각했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고 했다. 화를 낸 적도 기분 나쁘게 말한 적도 없는데 그냥 또 그 민원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래서 다음에 또 전화가 오면 마음에 각오를 하기 위해 휴대폰에 저장을 한다고 하는 것이 서툴러 문자로 발송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변명인지 진실인지 그 속내까지 알 수 없으나 내 행동이 민폐가 아니었다며 절대 오해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오해가 풀렸으니 더 이상 직원들이 나를 민폐녀로 여기지 말아 줄 것을 당부했다.
" 저 이제 관리사무소 와도 갑자기 바쁜 척하시고 그러지 않기예요! 요즘 집이 안 나가서 이사도 못해요. 저 북카페 자주 가니까 자주 얼굴 봐야 되는데 이제 웃으면서 봐요 ^----^"
적당한 미소를 머금고 발랄하게 말했다. 내 마음이 밝아져서 그런지 그제야 침침했던 관리사무소가 밝아졌다.
화를 내지 않았던 건 내 선택이었다.
여전히 화를 다루는 것에 미숙하지만
이 선택은 나를 제법 나이스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당신의 감정은 당신의 선택이다.
분노를 선택하지 말라.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