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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이서 Oct 24. 2024

현명한 포기

욕실 문을 열었다. 역시나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 샤워 후 스퀴지로 바닥 물기를 닦아 내는 게 이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인가 싶다. 아, 이 사람은 내 남편을 말한다. 


바빠서 그랬다. 깜빡했다. 주의하겠다. 미안하다. 당신이 좀 해주면 안될까.라고 말을 매번 돌려쓴다. 사람이면 느끼겠지 싶어 잔소리 대신 내가 몇 번 해줬는데 소용없었다. 


고백하지만 실은 나도 정리를 잘 못하는 편에 속한다. 이를테면 겉에서 보면 깨끗한데 수납장을 열면 물건들이 자유분방하다든지 옷장을 열면 티셔츠와 바지가 뒤범벅이 되어있다든지. 특히나 머리 고무줄은 사도 사도 자꾸만 없어졌는데 알고 보니 남편은 욕실, 침대, 구석 어딘가에서 보이는 족족 고무줄을 버린 것이었다.


대부분 한 번의 쓰임을 받고 버려지는 고무줄이 최근 들어 명이 길어졌다. 욕실에서 머리카락 몇 가닥 끼인 채로 발견되질 않나 침대 머리맡에서 똬리를 튼 채로 발견되는 기이한 일이 생겼다. 남편이 드디어 포기를 한 모양이다. 고무줄을 버려봐도 고쳐질 기미가 안 보이니 잔소리하는 대신 포기를 선택한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포기한 게 있다. 나는 바닥에 머리카락이나 먼지 같은 것을 보지 못한다. 그렇다고 실시간으로 스캔해서 청소기를 돌리는 부지런함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청소기를 꼭 돌려야 되는, 어쩌면 유난이다 할 것도 없는 평범함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남편은 오랜 자취 생활의 습관이 남아있었다. 마치 서양인들처럼 실내에서 신발을 신는 것인데 밖에서 신은 신발은 아니고 실외에서 신을 법한 슬리퍼 같은 신발이다. 아파트에 살면 층간 소음 문제로 실내화를 신는 건 당연하지만 문제의 포커스는 신발이 아니라 바닥 위생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데 있다. 이쯤 되면 외국 생활을 오래했나 하는 자연스러운 의문이 생기겠지만 캐나다에 6개월의 어학연수가 전부라 했다. 외국 경험이 전무한 나로서는 무시할 입장도 못됐다.


여하튼, 그러니 본인에게는 바닥에 머리카락이 뭉쳐져 흩날리는 것 따위가 전혀 동요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딱히 청소기를 돌릴 필요성이 없다고 했다. 어쩌다 먼지 지들끼리 엉켜 붙어 세력이 확장될 때쯤 돌돌이로 간편하게 처리하면 그만으로 살아왔을 게 뻔했다.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청소기질의 몫은 당연한 내 몫이 되어버렸다. 몇 번 잔소리를 했지만 그는 그때마다 최신형 다이슨 청소기로 내 입을 막았다. 현명한 놈이라 생각했다.


나도 바가지 긁는 대신 스퀴지나 긁어야겠다. 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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