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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속 따뜻한 인연

15_사소함에 뭉클

by 뉴우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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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서울에서 자취하며 공부한다. 딸이 안쓰러워 청소라도 해 줄 겸 일부러 시간을 내 서울에 갔다. 생각했던 대로 공부하느라 빨래가 밀려있고, 집안은 어질러져 있었다. 냉장고엔 먹다 남은 닭 다리 하나 포장 상자에 널브러져 있고, 한두 점 먹다 만 떡볶이에 온전한 건 딸랑 김치뿐이었다.

그날은 작년 여름, 장마 끝물에 습도가 높고 후덥지근한 날이었다. 밀린 빨래 돌려 빨래방에서 옷을 건조하고, 방 청소까지 마무리하고 딸이 학교에 돌아오기 전에 내 손으로 제대로 밥이라도 차려주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마트에 갔다. 차가 없으니 1킬로 떨어진 마트를 걸어서 갔다 왔다. 물론 버스를 타도 되지만 동네 구경할 겸 걸어서 마트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불렀다. 낯선 곳에서 나를 부를 일이 없으니 가던 길을 가고 있었다. 잠시 내 머리 위로 그늘이 졌다. “양산을 같이 쓰자”며,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가 양산을 내 쪽으로 살짝 내밀었다. “괜찮아요. 내 걸음이 빨라 보조 맞추며 걷기 힘들 거예요.” 손사래 치며 호의를 거절했다. “이 더위에 햇빛 가릴 것 없이 걷긴 힘들어. 내가 빨리 걸어줄게.” 할머니 말씀에 순간 미안해졌다. ‘발걸음이 빠르다’는 단호한 말로 거절한 게 민망해졌다.


그러고 보니 내리쬐는 햇살에 모자도 안 썼다. 딸의 집을 청소하느라 정신없이 움직이느라 내 꼴이 말이 아니었다. 양산을 같이 쓰고 할머니 발걸음에 맞춘다. “어르신은 어디 외출하시는 길이세요?” 내 물음에 할머니 수다가 시작됐다. 나는 할머니께 어디 가시는 길인지 여쭤보았다. 그러자 할머니는 서울 토박이 친구들과 점심 모임이 있어서 가는 길이라고 했다. 신도시 개발로 친구들은 하나둘 서울을 떠났다. 서울에 자기만 남았지만 모임 장소는 서울에서 해. 자식들과 신도시로 갔지만 정을 못 붙이겠대. 자신들이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서울에서 만나자고 해서 이 더위에 걷는 것조차 힘들지만 친구 만나는 일이 좋아.

처음 만난 나에게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털어놓는 할머니가 정겹게 느껴졌다. 내 한마디 질문이 할머니가 하고 싶었던 말문을 건드린 것 같았다. 할머니에게서 내가 배려받은 건 맞지만 한편으론 할머니에게 말벗이 필요한 걸 채워준 건 아닐까. 어쨌든, 셈할 일이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그저 우연히 만난 인연 덕분에 할머니도, 나도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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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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