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어떤 존재에 대해 의식하고 그에 비추어 내 행동이 변한다면 그 존재는 내게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보통 무생물은 그런 경우가 거의 없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것도 아니며, 생물이라고 항상 내가 그 존재를 의식해 행동하는 것 만도 아니다.
요즘 내가 의식하는 또 다른 존재는 고양이다. 고양이가 우리 집에 온 지 이제 보름 정도가 흘렀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이 녀석에 대해 생각한다. “지금 어디 숨어 있을까? 밤새 소파를 긁어놓지는 않았을까? 여기저기 또 배변 실수를 해놓지는 않았을까?” 나는 사냥꾼처럼 고양이의 흔적을 살핀다. 실제로 며칠 전 부엌 구석에서 녀석이 싸 놓은 소변을 발견한 적이 있다. 처음에는 물인 줄 알았지만 휴지로 닦아보니 색이며 냄새가 완연했다.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화장실이 세 개나 있는데 왜 하필 여기냐고?
나는 그놈의 심리를 분석해 본다. 혹시 나를 약 올리려고 일부러 저러는 것일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도 한다. 아마 저 놈은 내 심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그저 배변판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고, 그것도 아니라면 이제 중성화를 할 때라는 신호일 수도 있다. 여하튼 나는 고양이의 알 수 없는 머릿속으로 들어가 보려 노력한다. 배변판을 청소해 주고 새 모래를 깔아준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자마자 전날 고양이가 오줌을 쌌던 부엌 구석 쪽을 살폈다. 다행히 그곳은 안전했다. 약간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거실 복도를 지나는데 구석에 물기가 발견된다. 역시나 오줌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알코올과 락스로 부산을 떨고 나니 어제보다 더 화가 치밀어 오른다.
처음보다야 훨씬 나아졌지만, 고양이는 나와 남편을 경계하고 나 역시 고양이를 경계한다. 여전히 우리는 서로를 의식하고 있다. 거실의 소파처럼 텔레비전처럼 혹은 베란다 화분처럼 신경을 느슨하게 한 채 저 존재가 있든 없든 똑같이 행동할 수가 없다.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를 위치를 탐색하여 적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먹이를 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하지만 역시나 국가 원수들 간의 의례처럼 조심조심 적절한 절차에 따른다. 작디작은 돌발행동에도 나는 뒷걸음치고 고양이는 숨어버린다.
배변판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 녀석이 오줌을 싼 곳에서 간식을 먹였다. 그곳이 음식을 먹는 곳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였다. 어젯밤에는 부엌 구석에는 물그릇을, 거실 복도 끝에는 간식을 놓아두었다. 다행히 오늘 아침 집은 무사했다. 내 메시지를 이해한 것일까? 나는 여전히 저 녀석의 마음을 알 수 없다. 언제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있는 듯 없는 듯 편하게 바라볼 수 있을까? 아니 언제쯤이면 우리는 서로 바라보지 않고서도 한 공간에 함께 있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