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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나기 Mar 06. 2024

너의 속도를 존중해

고양이가 우리 집에 자리를 잡은 지 한 달이 흘렀다. 나무도 원래 살던 곳에서 뽑혀 새 땅에 심어놓으면 처음 몇 달간은 고전을 한다. 그 기간을 못 견디고 스스로 포기해 버리는 경우도 왕왕 있다고 한다. 하물며 나무가 그런데 살아 움직이는 동물이야.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듯 고양이도 그렇다. 우리 집에 들어온 이 고양이는 겁이 많다. 종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놀라 숨어버린다. 이미 자신이 이 새로운 환경에서 최약자임을 직감하고 있는 것이다. 드르륵 하는 커피 머신도 열고 닫힐 때 꺼억거리는 방문도 거실 한편에 놓인 실내자전거도 모두 자신보다는 윗길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고 확신할 때까지 수많은 뒷걸음질과 은신이 필요하다. 



물론 이 놈 역시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겁이 많다”는 말 한마디로 이 고양이를 단정 짓기에는 역시나 미끌미끌 어느새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고 없다. 겁쟁이란 것이 이 아이의 다른 성격을 덮어버릴 만큼 압도적이기는 하지만 문득문득 다른 성격들도 새어 나온다. 예컨대 생각보다 먹거리에 있어서는 예민하지 않다. 겁이 많은 아이들은 당연히 사료나 간식도 예전에 먹던 것만 고집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식사에 있어*서 우리 집 고양이는 꽤나 개방적이고 도전을 즐기는 편이다. 옛 주인의 말을 들어보니 퍼즐이 맞춰지는 부분이 있다. 



과거 이 아이는 6마리 고양이 틈에서 살아왔다. 겁이 많다는 특징은 6마리 중 이 놈의 서열을 짐작케 해 준다. 고양이 마릿수가 많다 보니 주인도 세심하게 한 마리 한 마리 식사며 간식을 챙겨 주기는 힘들었다고 한다. 여기저기 한 번에 사료나 간식을 놓아두면 힘센 놈이 먼저 가서 차지하는 구조가 될 수밖에 없다. 덕분에 이 아이는 간식을 제대로 챙겨 먹었던 기억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먹을 게 떨어지면 이것저것 따져가며 투정 부릴 여유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집에 온 이후 이 놈은 엄청난 식탐을 보이고 있다. 새로운 사료, 간식 어느 것 하나 주저하는 법이 없다. 




우리 가족들에게 조금씩 익숙해지고 자기 딴에는 자기 영역이라고 생각되는 공간이 조금씩 늘어나면서 녀석도 한결 편안해하기 시작했다. 이 놈의 마음을 읽을 수는 없지만, 아마 이제 여기가 집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것 같다. 이름을 부른다고 쪼르르 달려오지도 않고 반갑다고 머리를 비비거나 하는 일은 없지만 그래도 이 집의 바닥과 수많은 모서리들과 가구들과는 어느 정도 얼굴을 튼 것이다. 더 이상 문 여닫는 소리에 방충망 내리는 소리에 놀라 후다닥 달아나는 일은 없어졌다. 그렇게 경계에 사용되던 에너지는 호기심으로 전환되었다.




 사료, 사냥놀이 장난감, 고양이 모래, 캣닙스프레이 같은 자기 물건들이 들어 있는 캐비닛에는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연신 이마를 문질러 자기 냄새를 묻힌다. 예전에는 싱크대 문만 열어도 놀라 도망가기 바쁘던 녀석이 이제는 싱크대 안의 물건들에 관심을 보인다. 며칠 전에는 그간 녀석이 놀랄까 봐 안방에서 해오던 운동을 거실에서 해봤다. 요가 매트며 덤벨이며 조심스럽지만 가까이 다가와 한참을 쳐다보고 냄새 맡는다. 여기까지 오는데 한 달이 흘렀다. 고양이에 대해서 여러 권의 책을 읽고 미리 공부를 해두기는 했지만 사실 우리 집에 오게 될 고양이는 일반적인 고양이가 아니라 단 한 마리의 바로 그 고양이다. 이 녀석은 이 녀석 나름의 속도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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