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한 세계에서 찾는 의미
"바위를 밀다 문득 허공을 올려다보는 순간, 우리는 모두 시지프스의 후예입니다."
인간의 숨결이 깃든 이 지구라는 행성은, 우주가 내뱉은 무수한 우연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알람 시계가 울리는 월요일 아침,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리는 발걸음, 사무실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오후 세 시의 햇살 – 이 모든 것이 우주적 규모로 보면, 먼지 한 톨의 진동에도 미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이토록 아프게 살아갈까요?
알베르 카뮈는 이 딱딱한 현실을 '부조리'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인간이 이성으로 우주를 해석하려는 욕망과, 우주의 침묵 같은 무관심이 부딪히는 그 틈새에서 피어나는 모순이죠. 하지만 이 부조리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오히려 가장 인간다운 빛을 발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의 계획을 기다리지 않고, 증명되지 않은 내세에 기대지 않으며, 오로지 지금 이 땅에서 발바닥으로 느껴지는 모래 알갱이의 온도를 기록하는 존재. 그게 바로 카뮈가 말한 '반항하는 인간'의 초상입니다.
매일 아침 세숫대야에 비친 얼굴이 낯설게 느껴질 때, 우리는 이미 철학의 가장 깊은 물음에 발을 담그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가 신을 향해 절벽에서 뛰어내리듯 믿음을 선택한 것과 달리, 카뮈는 절벽 끝에서 발끝으로 균형을 잡으며 웃습니다. "이 절벽이 진짜인지 아닌지 누가 알겠어? 어쨌든 지금 이 바람은 시원하군." 그가 본 부조리는 신화 속 형벌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깨우치는 자유의 종소리였습니다.
회사 엘리베이터 안에서 옆자리 동료와 나누는 무의미한 일기예보 이야기, 퇴근길 편의점에서 집어 든 삼각김밥의 포장지를 뜯는 소리, 새벽에 잠에서 깨여 스마트폰 화면을 터치하는 손가락 끝의 저릿함 – 이 모든 일상의 파편들이 바로 영원을 향한 우리의 반란이 됩니다.
신이 없다면, 모든 행위는 신성함을 잃을까요? 아니, 오히려 신이 없는 세계에서는 매 순간이 성스러워집니다. 커피 한 잔의 온도가 우주의 팽창을 기록하는 척도가 되고, 지하철에서 우연히 마주친 낯선 이의 미소가 빅뱅 이후 138억 년 동안 준비된 기적이 되는 순간들. 그 기적을 알아볼 줄 아는 것, 그것이 부조리 속에서 찾는 작은 승리입니다.
카뮈는 이 부조리를 외면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종교가 제시하는 완성된 해답은 철학적 자살이라고, 이데올로기가 약속하는 유토피아는 스스로의 눈을 가리는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대신 그는 사막 한가운데 서서 모래바람에 휩쓸리며 춤추라고 제안합니다. 그 사막이 끝이 없는지, 어딘가 오아시스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발아래 뜨거운 모래가 지금 내 발바닥을 태운다는 사실 자체가 진실이니까.
우리 시대의 시지프스들은 출근길 버스 정류장에서, 야근 끝에 비어 있는 오피스텔 복도에서, 병원 문진표를 작성하는 순간에도 바위를 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배워야 할 것은 바위를 언덕 꼭대기에 올려놓는 기술이 아니라, 바위가 굴러내려 오는 경사면에서 피어나는 들꽃의 이름을 불러보는 마음입니다.
삶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은 오히려 우리에게 무한한 창조의 자유를 줍니다. 마치 화가가 하얀 캔버스를 앞에 두고 떨리는 붓을 들 때의 그 전율처럼. 신이 정해놓은 운명의 레일을 달리는 기차가 아니라, 눈 덮인 들판을 마음대로 질주하는 순록이 되는 것. 키에르케고르가 믿음의 도약으로 메꾸려 했던 공허를, 카뮈는 그 공허 자체로 가득 채웁니다. 사막의 모래알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처럼, 우주의 무관심 속에서도 인간은 제 나름의 의미를 짜 맞출 권리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어제저녁에 먹은 된장찌개의 간이 맞지 않았던 것, 그게 바로 우주가 당신에게 보내는 러브레터일 수 있습니다. 찌개를 다시 끓이면서 "이번엔 좀 더 멸치 육수를 넣어야지"라고 중얼거리는 그 말뿐인 결심이, 바로 신이 부여하지 않은 삶의 무게를 짊어지는 용기입니다.
우리는 종종 영웅적인 순간을 기다립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위대한 업적을, 혹은 모든 것이 해결된 완벽한 행복을. 하지만 진정한 반항은 그런 드라마틱한 순간이 아니라, 아무도 모르게 스치는 일상의 순간들에서 피어납니다.
예를 들어 20년째 같은 자리에서 도시락을 파는 노점상 아저씨가, 오늘도 구겨진 비닐장갑을 끼고 김밥을 말 때의 그 정확한 손놀림. 지하철에서 우산을 흠뻑 적신 채 올라온 학생의 머리칼을 슬쩍 보며 "우산 좀 접어서 들게"라고 말하는 경비원의 퉁명스러움. 이 모든 것이 카뮈식 반항의 현대적 변주입니다.
그들은 영원을 묻지 않습니다. 오늘 하루 버티는 법만 압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도시락 장수가 김밥을 말 때의 집중력은, 로봇이 결코 따라 할 수 없는 인간의 위대함입니다. 기계는 절대 모릅니다. 단무지 조각을 놓을 때 약간의 공간을 남겨야 쌀알이 퍼지는 맛이 산뜻해진다는 걸.
이 부조리한 세계에서 희망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습니다. 희망이란 미래에 기대는 마음이니까. 카뮈는 현재를 배반하는 모든 희망을 의심했습니다. 대신 그는 현재의 불꽃을 삼키라고 말합니다. 마치 모래폭풍 속에서도 자기 축제를 열며 춤추는 사막 부족처럼.
오늘 내가 경험하는 이 고통, 이 기쁨, 이 지루함, 이 설렘 – 이 모든 것이 내 삶의 전부입니다. 내일의 태양이 뜰지 예측할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 창문에 비치는 이 햇살의 각도는 138억 년의 우주 역사상 단 한 번뿐인 각도입니다. 그 각도를 측정할 줄 아는 자가, 비로소 부조리를 사랑하는 법을 아는 자입니다.
"내일 아침 바위는 다시 굴러내려 올 테지만, 오늘 내 손등에 묻은 암석 가루가 은하수로 변하는 순간을 목격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