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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 나쁜 날

출발부터 뭔가 좋지 않아... 조심해야 해!

by 벼꽃농부

일진이 사나운 날엔 그저 아내 뒤만 졸졸 따라다녀야 합니다.

그래야 나를 엄습하는 악의 기운을 아내의 큰 밥주걱으로 퇴치시킬 수 있으니까요.

아내가 즐겨 입는 뽀바이 청바지 뒷 주머니 한 쪽엔 힙하게 핸드폰이 흔들거리고 다른 쪽 주머니엔 언제라도 한 방에 '쫙'하고 떡매를 칠 듯 넓다란 나무주걱이 꽂혀 있습니다.


추석 장을 보기위해 저 멀리 재래시장으로 가야해서 오랜만에 기름먹는 황소를 끌고서 힘겨이 지하주차장 오르막을 거의 다 올라왔을 때였습니다.

마침 그때 이제 막 지하로 진입하려는 덩치가 훨씬 큰 흰 코끼리는 나를 보더니 저리 비키라며 코를 휘익 휘익 두 바퀴 돌리며 위협을 주더군요.

힘겹게 올라온 오르막을 다시 뒷걸음하여 내려가려니 뒤도 보이지 않고 영 내키지 않더군요.

아내는 저의 엉거주춤한 모양새가 맘에 안 들었던지 흰 코끼리를 향해 들리지도 않는 소리를 냅다 질렀습니다. "이봐요~ 그쪽이 조금만 뒤로 가요. 우린 다 올라왔잖아요."

한 쪽 손은 서부영화 총잡이가 금새라도 콜트 6연발을 뽑아들어 적의 심장에 총알을 박아 넣을 듯 기세가 등등했습니다.

움찔한 상대는 우리 쪽 아우라를 보았는지 비상등을 깜빡이며 서서히 뒷걸음치며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 틈에 저는 한 손을 들어 올리며 고맙다고 했으나 코끼리의 찢어진 눈을 보지 않으려 창문은 내리지 않았습니다.


아파트 정문으로 향하던 황소를 가로막는 또 한 마리의 까만 늑대는 보이지도 않을 배꼽을 중앙선 위에 올린 채 빨갛고 샛노란 눈으로 우리를 째려 보았습니다.

늑대의 눈동자에는 아주 조그마한 글이 깨알 같이 써 있었는데... '뭘 보고 있냐? 저리 썩 비켜라. 콱 물어 버리기 전에'

저는 건강검진 때마다 시력을 측정하는데 신기하게도 조금씩 수치가 높아집니다. 좋아지는 거죠.

지난 번엔 왼쪽이 1.2이고 오른쪽이 1.5나 되었어요.

매년 같은 병원에서 똑 같은 시력검사표로 측정을 한 탓일까요 아니면 시금치를 좋아해서 일까요?

아참! 어쨋든 저는 늑대의 눈에 쓰인 글을 보고 또 다시 후덜덜한 마음에 그저 운전대만 꼭 잡고 미동도 하지 못 했습니다. 아내의 입술은 벌써 실룩거리며 한 마디 독설을 내뱉었습니다.

"이건 또 뭐야~ 이쪽이든 저쪽이든 얼른 안 비켜" 아내는 급한 마음에 창을 내리는 걸 잊은채 손으로 이리저리 휘저으며 독설을 쏘았고 그 독기찬 말은 우리 차 안에서 메아리 치며 내 뒷통수와 볼따구를 연신 두들겼습니다. 한참을 으르렁 대며 금새라도 송곳니로 우리 황소의 정강이를 물어 아작낼 것 같던 늑대는 꼬리를 슬그머니 내리며 한 쪽으로 비껴서더군요.

이 때도 저는 늑대의 눈을 보지 않았습니다. 저를 기억하고 있다 후일 아내가 없는 날에 저를 물어뜯을 수 있으니까요. 조금 고개만 숙이는 채로 슬금슬금 지나왔습니다.


아내는 별스럽지 않게 집에서 타 온 커피를 음미하며 구름 낀 가을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아~ 가을이라 그런지 하늘이 너무 이쁘다. 그치? 자기야"

저는 마른 침을 삼키며 분위기를 맞춰 주었습니다. "그러네. 하늘이 늑대색이야."

아내가 잠시 저를 돌아보더니 고개를 15도쯤 젖힙니다. "뭐라고? 늑대?"

이게 무슨 개풀뜯는 소리랍니까. 얼른 깜박이 넣고 좌회전을 했습니다.


시장 안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이 꽉 차 있고 맛있다고 소문난 어묵튀김집은 벌써 줄이 한참이나 멀어져 있습니다. 저걸 먹자고 기다렸다가는 시간이 부족하니 그냥 입맛만 다시며 지나쳤고 저기 멀리 있는 반찬집으로 서둘러 갔습니다. 역시 맛있다고 소문난 반찬집이라서인지 이곳도 줄이 갈지자로 두어번 꼬여 있습니다. 안 돼겠다며 아내는 저를 줄타기에 매어논 채 종종거리며 어물전으로 가더군요.


그렇게 줄타기하며 지나가는 사람도 구경하고 사야 할 반찬을 미리 이리저리 보며 메모장에 쓰고 있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하더군요.

아내가 저를 매달아 놓았을 땐 제 앞에 계신 분이 육십은 넘어 보이던 아주머니였는데 이제보니 젊은 여자가 어느샌가 제 앞에 서 있는 겁니다.

이걸 어쩐다? 말을 해 볼까 말까. 이따가 아내가 돌아왔을 때 제가 새치기 당한 걸 알면 어떡하지?

'아... 진짜'

그래도 저보다 나이가 어려보이는 젊은 여자이니 한 번 쎄게 나가보려 팔뚝을 툭 건드렸습니다.

"저기요. 제가 저분 뒤에 서있었는데 그쪽이 왜 제 앞에 있는 거예요?"

젊은 여자는 역시 젊었습니다. 아까 본 까만 늑대는 저리가라 할 정도의 찢어진 눈과 쥐 잡아 먹은 시뻘건 입술을 오물거리며 저를 위아래로 쭉 훑어보더니 메마르고 카랑카랑한 쉰소리를 뱉습니다.

"뭐래? 아까부터 줄 서있었는데?"

이건 분명 반말인거죠? 맞죠? 그런데 전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 했습니다. 기가 죽었거든요.

저는 존댓말로 했는데 느닷없이 반말이 오니 '켁'하고 기에 눌려 버린 겁니다. 그냥 제 발끝만 내려 보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아내는 다행히 이 사단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육십대 아주머니나 싸가지 젊은 여자나 둘다 검정옷이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 짐을 1층 엘리베이터에 내려 놓고 아내는 먼저 올라갔습니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 겨우겨우 빈 자리를 한 군데 찾아 주차를 하고나니 이제야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옵니다.

'휴~ 이제 다 됐지?' 편한 마음에 1층 현관을 통해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뒤 따라오는 윗층 남자를 보았습니다. 이 남자와는 몇 년을 같이 오가며 인사하는 터라 어느층에 사는지 정도는 알고 지냅니다.

먼저 탄 저는 6층을 누른 후 뒤 따라오는 남자를 위해 버튼을 눌러 문이 닫히지 않게 하는 매너를 보였습니다. 뛰듯이 탄 남자는 '5층이시죠?'하며 6층을 취소하고서 5층을 눌러 버립니다.

'엥?' 이건 뭐지?


휴~ 오늘이 가려면 아직 몇 시간 남아 있습니다.




아내만 졸졸 따라다녀야겠습니다.


[예쁘고 무서운 내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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