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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진 Sep 20. 2024

그 사람에게 사랑을 배우다

#5 연애  


   

 나는 종로M스쿨 학원으로 옮긴 상태였고 오빠는 대학 졸업반으로 취업 준비생이었다.

 내가 학원 선생님과 그 대학 선배를 소개팅 시켜준 이후로 힘들어 하고 있었는데 오빠가 나를 많이 다독여 주어서 버텨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사실 대학 4학년 때 몇 번 소개팅을 한 적이 있었는데 조건만 본다면 다 스펙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근데 오빠는 취준생으로 대학생이었기 때문에 차가 없었고 돈도 없었다. 그래서 이 때는 7:3 비율로 데이트 비용을 내가 7을 내서 오빠가 부담을 갖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뚜벅이 커플이었던 때 데이트가 끝나면 우리 집에 데려다 주기 위하여 동암역까지 와서 마을버스를 타고 우리 집 앞까지 데려다 주는 정성에 자상함과 따뜻함을 느꼈다.

 오빠는 전형적인 A형이었는데 다혈질이었던 나와는 달리 침착하고 감정 기복도 없이 긍정적인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자상하면서도 유머감각이 있어서 날 웃게 해 주었다.

 역시 사랑을 하고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위로가 되었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가정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고 약 20년 동안 학대를 당해왔기 때문에 상처와 트라우마가 깊어서 그 때 까지도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빠를 만나고 부터는 안정감이 들고 행복하고 설레여서 그런지 마음의 상처가 점점 호전되어 차차 약을 줄이기 시작했고 결혼할 때 쯤에는 거의 약을 끊은 상태가 되었다.

 어느 날 오빠한테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털어놨다.

 내가 당한 폭력과 학대를 그리고 그 트라우마로 인해 정신과 약을 복용하는 것에 대해 숨기고 싶지 않았다.

 처음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유일하게 털어 놓은 사람이다.

 오빠는 내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조용히 다 들은 다음에 속으로 상처가 많은 나에게 더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연애하는 동안에 나한테 큰 소리를 치거나 화를 낸 적이 한번도 없었다. 나의 모든 것을 받아주었다.

 그런데 예전에 대학교 때 지하철에서 어지러움 때문에 쓰러진 적이 있었는데 아직까지도 스트레스가 누적 되면 어지러움이 심해져 응급실을 가거나 정도가 심하지 않으면 집에서 쉬어야 했다. 이런 증상들이 갑자기 나타나기 때문에 학원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과장님께 말씀드리고 조퇴한 적도 몇 번 있었다.

 실제로 오빠랑 데이트를 하다가 갑자기 어지러움 증상이 심해져서 정신을 못 차리고 식은땀을 흘리며 걷지도 못하는 모습을 오빠가 보게 된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럴 때면 데이트 하다가도 난 집으로 들어갔고 증상이 매우 심할 때면 응급실에 가야 했다.

 오빠는 내가 그런 모습을 보이면 항상 울었었다.

 그럴 때 마다 지금은 내가 학생이고 그럴만한 능력이 없어서 미안하다며 자기가 돈을 벌면 꼭 너의 병을 고쳐 주겠다고 말하고는 했다.

 그 말만으로도 고마웠다.

 그리고 겨울 어느 날 쇼윈도에 걸려있는 흰색 코트가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매장에 들어갔고 약간 공주풍의 청순함이 느껴지는 코트여서 마음에 들어 가격표를 봤는데 20만원이 넘는 것이다.

 내가 그냥 나오려고 하는데 자신이 사 주겠다며 그 코트를 선물해줬다.

 오빠한테 받은 첫 선물이라 애지중지 해서 그 코트는 버리지 않고 결혼하고 나서도 내 옷장에 넣어 났었다.

 근데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코트 값을 벌기 위해 일명 노가다를 했다는 것이다.

 너무 미안했다.

 그래서 오빠가 취업하기 전 까지 마음에 드는 것이 있어도 혹시 부담을 느낄까봐 갖고 싶은 것이 있어도 티를 내지 않았다.

 사실 오빠네 집은 부유한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흑석동 달동네로 아버지는 노동일 미장을 하시는 분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일이 있을 때에는 일을 하시고 일이 없을 때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오빠는 대학 등록금을 내기 위해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했고 장학금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공부도 열심히 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사 한 번 안하고 살고 있다고 했다.

 난 그 사람만을 보았기 때문에 그런 조건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 친구들은 변호사, 삼성, 상공회의소, 공무원, 펀드매니저 등 이 친구들이 조건을 보고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남자친구들이 비교적 연봉이 높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친구와 학원 선생님들은 인기도 많은 편인데 이 나이에 아무것도 보장되어 있지 않은 학생을 만나냐며 다른 사람을 소개시켜 줄 테니 좀 조건도 좋고 경제적으로 안정이 된 사람을 만나보라고 했다.

 조건을 보는 것이 뭐가 나쁘냐고 했다. 다들 겉으로는 스펙을 안 보는 것 같아도 미래의 배우자 직업에 대한 설문조사를 보면 미래가 안정되어 있거나 높은 연봉을 받는 직업군이지 않냐고 설교 아닌 설교를 했다.

 다른 곳에서도 7급 감사원을 소개시켜 주겠다는 등 소개팅 의뢰가 몇 번 들어왔지만 나에게 그 사람은 사랑이었기 때문에 생각할 겨를 없이 거절했다.

 조건도 조건이지만 성실함과 성격이 1순위였다.

 오빠는 나랑 만날 때 마다 너가 너무 웃기다고 어떻게 그런 생각과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재밌다고 했고 나 또한 오빠의 엉뚱함과 독특함에 웃음이 나올 때도 있고 말은 많지 않지만 가끔 툭툭 내뱉는 한마디가 왜 이렇게 웃기냐고 할 만큼 유머코드도 잘 맞았다.

 내가 직장을 다니고 있기 때문에 일주일에 두 번 밖에 만나지 못했다. 그 당시 체력과 면역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그래서 평일에 한번 토요일에 한번, 이렇게 두 번 만났다. 일요일은 집에서 쉬지 않으면 다음 주가 매우 힘들어져서 주말 중에 토요일만 만난 것이었다.  

 학원 강사 일도 수업 및 전화상담, 잡무 등으로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일주일에 하루인 일요일은 쉬고 싶었고 나만의 시간도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요일은 온전히 나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오빠는 내가 좋아하는 남성상으로 바꾸려고 노력했다.

 내가 어깨가 넓고 가슴도 넓은 사람을 좋아한다고 했더니 그 때부터 헬스를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오빠 어깨가 좁은 편이었다. 그래서 책가방을 멨을 때 어깨가 사라질 정도였는데 차마 그걸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꾸준히 6개월 정도 헬쓰를 하더니 정말 어깨가 벌어지고 가슴도 넓어졌고 복근까지 생겼다.

 그렇게 열심히 운동한 몸의 상체를 탈의하고 사진을 찍어서 보내줬는데 너무 섹시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이후로 운동을 하지 않아서 복근은 사라졌지만 벌어진 어깨는 그대로 유지되어서 옷발이 잘 받았다.

 또 어느 날은 남자가 스포츠 머리를 하면 멋있게 보인다고 하니까 바로 다음 주 만남에 스포츠 머리를 하고 저기서 나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며 예전에 처음 봤을 때의 개구쟁이 같이 둥글둥글 했던 이미지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점점 더 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나의 연인이었다.


 #6 내 남자친구는 취준생


     

 오빠는 대학 4학년 2학기부터 취업하기 위해 취업의 제1차 

관문인 입사서류를 넣으며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 했다.

 서류전형에서 번번이 떨어졌는데 우선 토익 점수가 너무 낮았다. 

대학 4학년이 돼서야 토익을 공부했고 공부하는 만큼 토익

 점수가 안 나왔다. 처음에는 토익 점수가 600점 대 였는데 

공부를 아무리 해도 700점 조금 넘는 정도까지 밖에 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기업에서 선호하는 경영학과, 경제학과 등이 아니라 

아닌 인문학과로 국문학을 전공했다는 것과 졸업은 인하대로

 최종 졸업장을 받았지만 인하대 졸업 전 군산대에 입학했다가

 편입한 것도 불이익이라며 계속 서류 전형에 떨어지는 이유를

 분석했다.

 오빠는 일단 직종과 업종을 가리지 않고 입사 원서를 냈다.

 그 중 서류 전형을 통과해서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하면 오빠와

 나는 들뜬 마음 반, 걱정하는 마음 반이 돼서 기대를 걸고는

 했지만 면접에서도 1차에 떨어지거나 아니면 최종 면접에서

 떨어지는 등 계속해서 구직 활동을 했지만 취업은 안 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계속 시간은 흘러갔고 오빠는 대학을 졸업 하고도 

구직 활동을 이어 나갔는데 졸업하고 8개월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취업이 되지 않았다.

 그 때는 내가 종로M스쿨에 다니고 있는 때여서 교무실에 

여자 선생님만 20명이 있는 곳으로 서로의 남자 친구 직업 

등에 관심이 많았고 말도 많은 곳이었다.

 내가 대학생을 만난다고 했을 때 어떤 선생님은 

 ‘아...선생님이 퇴근할 때 남자친구가 몇 번 학원 앞에 

와서 기다린 적 있었죠?’

 ‘네’

 ‘아니 버스가 왔을 때 둘이 손잡고 뛰어가서 버스를 탄

 이유가 있었네. 학생이니까 차가 없겠구나’ 라는 얘기도

 하시고 결혼한 분들은 내가 만나고 있는 남자친구가 처음

 만나는 남자친구라는 것을 알고는 요즘도 그런 사람이

 있냐며 여러 남자를 만나봐야 아는 거라면서 양다리를 걸치면서 

다른 사람도 만나 보라고 권유했다.

 그럴 때 마다 웃으면서 넘어갔지만 사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초조해 지고 있었다.

 남자친구는 구직 활동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불면증이

 있었고 하루 종일 하는 일도 없어서 심심하다며 나랑

 전화 통화를 새벽 4시까지 했다.

 피곤해서 전화를 끊으려고 하면 끊지 말라고 했고 

그렇게 통화를 많이 하는 것을 본 엄마는 나 보고 

미쳤다고 했다.

 정말 사랑의 힘이 없었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친구로부터 전화가 와서 받았는데

 그래도 중견기업에 해당되는 A제약회사 영업사원으로 

최종 합격을 했다며 인터넷에 들어가면 최종 합격자 

명단이 있을 테니 들어가서 보라고 했다.

 너무 기뻐서 바로 인터넷 기업 홈페이지로 들어갔는데

 오빠의 이름 세 글자가 보이자 자랑스러웠고 합격을 

기념하고자 그 화면을 캡쳐 해서 저장해 놨다.

 선생님들에게 남자 친구가 드디어 직장인이 되었다고

 말했고 잘 됐다면서 축하해주셨다.

 나중에 한 얘기지만 오빠는 대학원에 가서 국어 

교육을 전공하고 임용고시를 봐서 국어 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를 너무 기다리게 하는 것이 미안했고 직종

 중에 영업사원을 택한 이유는 자신이 하는 만큼 인센티브가

 나오고 실적에 따른 연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선택했다고 말해줬다.

 난 진심으로 축하해줬고 1년 8개월 만에 취업한 오빠를 응원했다.     


#7 슬기로운 직장생활     


 A회사에 입사한 오빠는 한 달 동안 지방 연수원 생활을 했다.

 매일 길게 통화하다가 짜여진 연수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자기 전 짧게 통화하고 만나지도 못 해서 외로웠다.

 한 달도 길게 느껴졌다.

 오빠가 말하기를 매일 시험을 보는데 성적에 따라

 맡는 병원이 다르다고 했다.

 우선 성적 순으로 대학병원 및 종합병원, 세미병원,

 개인의원, 약국 등의 순서로 맡게 되는데 5등 안까지만 

대학병원과 세미병원을 맡을 수 있기 때문에 꼭 5등

 안에 들어야

 한다고 했는데 정말 턱걸이로 5등을 해서 여러 세미병원을

 담당하게 되었다.

 세미병원은 대학병원까지는 아니지만 바로 그 밑의 규모가

 어느 정도 있는 병원을 말한다고 했다.

 서울, 경기권을 맡았는데 여러 병원을 다녀야 하는 직업이어서

 취업 이후에 할부로 자동차를 사는 영업사원이 많았지만 오빠는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지금은 김포가 많이 발전이 됐지만 그 때만 해도 논, 밭이 많았는데

 김포에 있는 세미병원을 가기 위해서 버스를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배차간격이 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버스를 놓치거나 하면 

두 시간을 기다려야 했는데도 자동차를 사지 않았다.

 오빠는 살 생각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직장 들어간 지 얼마 됐다고 

벌써 차 뽑을 생각을 하냐며 반대해서 사지 못 했다. 

 사실 외국계 제약회사 초봉은 3500만원에서 5000만원 

정도였는데 오빠는 국내 제약회사이고 제약회사 중 중견기업에 

속하는 회사로 그때 당시에 연봉은 초봉 2400만원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연봉은 내가 더 높았다.

 오빠의 연봉이 조금 약한 편에 속하긴 했었다. 그래도 자신을

 받아 준 첫 회사라며 충성심이 강했고 성실한 성격답게 여기 

저기 다니면서 영업을 시작해서 실적 1위를 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1년에 구두 굽을 몇 번 갈아야 할 정도로

 일하러 다녔고 pc방에서 게임을 하거나 동료들과 당구를 

치는 등 요령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그 때 내가 생각한 것은 저런 사람이라면 결혼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이 때부터 더 진지하게 오빠를 만났다.

 워낙 실적이 좋았기 때문에 1년 후 연봉 평가에서 A를 받았고

 오빠는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나중에 오빠가 말하기를 내가 없었으면 자신이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원동력은 바로 ‘나’ 라고

 얘기 했다. 그리고 고생을 많이 한 나를 고생시키지 않기 위해 

정말 발로 열심히 뛰어 다녔다는 말에 나는 너무 고마웠다.     

#8 드디어 우리에게 자동차가 생겼다!     

 오빠를 처음 만난 것이 25살이었으니까 횟수로 4년이 지난

 28살에 드디어 우리의 차가 생겼다.

 그 동안 뚜벅이 커플로 춘천 등 여행을 갈 때도 편안하게 자가용을 

타고 간 것이 아니라 열차를 타고 버스를 타며 이동했었다.

 그런데 오빠가 취업해서 모은 돈으로 취업한지 1년여가 지났을 때 

준중형차에 속하는 쎄라토 경유차를 뽑았다.

 오뻐는 차를 너무 갖고 싶어 했기 때문에 무슨 결정 장애가 있는 

사람처럼 차를 살 때 까지 거의 2~3개월이 걸렸다.

 대리점에 들어가면 영업사원들이 다가와서 잘해주는데 오빠가 

영업사원이어서 늘 ‘을’ 이었는데 자동차를 사러 갈 때는 ‘갑’ 이

 되는 것도 좋았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갑질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중형차는 무리였기 때문에 준중형 차를 선택하려고 했고 그 중에서도

 계속해서 엄청나게 고민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다 답답할 정도였다.

 처음에는 오빠가 이 차 어때 하며 팜플렛을 보여주면 거의 정독하면서 

관심을 보였는데 나중에는 오빠가 알아서 하라고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쎄라토 경유차였다. 물론 일일 영업 활동비가

 나오고 한 달 교통비가 나오는데 아무래도 이동하는 직업이라 휘발류

 차 대신 기름값이 싼 경유차를 선택했다.

 처음 차를 뽑아서 학원 앞에서 멋있게 기다리던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드라마 꽃 보다 남자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인 ‘흰 천과 바람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어’ 처럼 이제는 이 차만 있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촌스럽게 마치 레이싱 모델처럼 차 안에서 그리고 차

 밖에서 포즈를 다양하게 취하며 사진을 마구 찍어댔다.

 근데 한 가지 걱정됐던 것은 운전 실력인데 차를 뽑기 전 까지

 운전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오빠는 아버지의 오래된 차로 몇 

십년 된 씨에로 차를 타고 운전연습을 했는데 오빠가 그동안 장롱면허여

서 처음에는 운전 감각이 조금 떨어지는 바람에 뒤에서 

빵빵 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한 여름이었는데 워낙 오래된 차라 에어컨이 안 나와서

 모든 문을 열고 다녔는데 열이 많은 나는 여러모로 죽을 

지경이었다. 또 창문을 여는 것이 자동이 아니라 수동으로 

손잡이를 열심히 돌려야 했다.

 솔직히 조금이라도 창피하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어쨌든 오빠는 차를 뽑고 나서 영업을 위해 여기 저기 이동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카 레이싱 선수처럼 너무 속도를 내고 다녔고 

신호도 안 지키고 다니기도 해서 한 달 과태료가 25만원이 

나올 정도였다.

 나는 함부로 운전하는 오빠한테 화가 났고 나 놔두고 죽고 

싶으면 계속 이런 식으로 운전 하라고 했더니 거칠게 운전하는 

습관을 고치기 시작했다.

 아무튼 드디어 붕붕이를 타고 편하게 다닐 수 있었고 차가 생기자 

교통 문제로 가기 꺼려했던 곳도 가게 되고 내가 가고 싶어 했던

 아침고요수목원을 가는 등 붕붕이는 우리와 추억을 함께 했다.

 이 차가 첫차여서 결혼 후 몇 년 동안 이 차와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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