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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진 Sep 20. 2024

내 꿈을 포기하게 만든 아빠

 아빠는 약속한대로 정말 술을 끊었다.

 술 마시고 싶을 때 마다 혀를 깨물어 피가 나오면 그 피를 삼켜가면서 술을 끊었다고 한다. 

 의사 선생님이 알콜 중독에서 헤어 나오기 힘든데 정말 술을 끊었냐고 물으시면서 대단한 의지라고 칭찬까지 해 주셨다.

 이렇게 술을 끊은 아빠는 다시 가게를 하고 싶어 하셨다.


 고기 집을 차리려고 하셨는데 전에 했던 호프집 권리금과 보증금으로만 새 가게를 얻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종로 M스쿨에 취업하기 전 작은 학원에서 박봉을 받으면서도 한달 용돈 20만원만 쓰고 6개월 동안 그 당시에 모은 돈이 약 800만원이었다.

 사실 그 돈은 내가 대학원을 가기 위한 등록금이었다.


 내 친구들은 집이 부유한 편이어서 스펙을 올리고자 대학 때 해외 어학연수를 가는 친구도 있었고 미국으로 대학원 유학을 가는 친구도 있었다.

 그리고 국내 대학원에 들어가서 끊임없이 자기 개발을 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대학 재학 시절에 엄마와 장사를 해서 같이 생활비와 내 등록금을 벌었기 때문에 대학 졸업 후 바로 대학원에 진학한다 해도 적어도 아빠가 말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었던 이유는 단순히 가방 끈을 늘리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토록 전공하고 싶었던 언론정보학에 대해 공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빠는 ‘대학원’ 이라는 말만 나와도 흥분을 했다.

 하긴 대학 가는 것도 탐탐치 않게 생각했는데 거기다 대학원을 가겠다고 하니 화가 난 것이다.


 아빠가 대학병원 정신과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지만 분노 조절 장애로 인해 한번 화가 나면 거의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소리 소리를 질러대면서 자신의 분이 풀릴 때 까지 화를 냈는데 대학원 얘기만 나오면 그렇게 화를 내고는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나한테 통장에 얼마 있냐고 물어서 난 솔직하게 800만원 정도 있다고 했더니 이번에 아빠가 차리는 식당에 그 돈을 전부 보태라는 것이다.


 그 나이에 먹고 싶은 것 안 먹고 옷도 제대로 사 입지도 않고 대학원 등록금 자금으로 쓸 돈을 차곡차곡 모으고 있었기 때문에 그 돈을 갑작스럽게 보태라는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엄마가 나서서 얘가 사회에 나와서 처음 번 돈이고 옷도 안 사 입어가면서 아끼고 아껴 모은 돈 이니까 현진이 돈 까지 끌어다 쓰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아빠가 또 폭발해 버린 것이다.


 ‘부모가 그동안 키워 줬으니까 부모가 어려울 때 돈을 보태주는 것은 당연한거야! 그러니까 너도 아깝게 생각하지마. 내가 그 돈을 엉뚱한데 쓰려는 것도 아니고 먹고 살려고 하는 건데 자식이라면 당연히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 때 내가 대답하기를

 ‘사실은 대학원 가려고 저금해 놓은 돈이에요’


 ‘뭐 대학원? 니가 대학원 나와서 뭐하려고? 그리고 요즘 취업하기 어려운데 대학원 나오면 취업 잘 된다는 보장이라도 있어?’ 라며 흥분해서 큰 소리로 당신의 말만 해 대고 있었다.

 난 그냥 눈물이 났다.

 내가 대학원에 갈 테니까 등록금을 내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자식이 스스로 대학원 입학금을 마련해서 대학원에 진학 하고 싶다면 자식의 삶이니까 응원해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난 엄마를 생각해서라도 이 싸움을 오래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말이 안 통하는 아빠와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내 꿈을 위해 아끼고 아낀 돈을 내 놓았다.

 그렇게 해서 아빠는 가게를 차렸고 가게 이름은 내가 지은대로 ‘드럼통 숯불 갈비’ 로 결정했다.

 아빠는 약 1년 반 동안 가게를 운영했다.

 처음에는 의욕적으로 가게를 책임지고 운영해 나갔다. 손님들은 점점 많아지고 장사는 잘되고 있었다.

 장사가 잘되자 그 때부터 가게가 잘 알아서 굴러 간다고 생각한 아빠는

 가게에 관련된 기본 일부터 전부를 종업원에 맡기고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잦아졌다.

 그리고 이 때 ‘바다 이야기’ 라고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던 도박 게임장이 처음 생겼을 때 가게에서 번 돈을 가지고 바다 이야기에 가서 거의 매일 게임을 했다.


 도박 게임기는 사람이 기계를 이길 수 없는 시스템이다.

 그 때 당시에 시사고발프로그램에서 조폭들이 대부분 운영하고 있는 바다 이야기는 처음 온 손님이다 싶으면 돈을 딸 수 있게 만들어서 계속해서 오락을 하게끔 유도하고 중독이 됐다 싶으면 컴퓨터 조작을 통해 계속해서 돈을 잃게 만드는 영업 실태를 고발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불법 영업장에서 매일 도박 같은 게임을 했기 때문에 가게를 하면서 엄마에게 생활비를 준 적이 없었다.


 그리고 가게에 오는 손님이 점점 줄어들어서 하루에 몇 테이블을 받을까 말까 했다.

 그나마 간신히 월세만 내고 있었다.

 그래서 가게를 접게 되었다.

 그래도 엄마와 나는 이렇게 위로 했다.

 술 마시고 폭력을 휘두르는 것 보다 차라리 도박하는 게 낫다 라고 말이다.

 그 정도로 가정 폭력을 두려워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학원 강사를 하고 엄마는 장사를 하고 남동생은 군대에 있었는데 이 시간에 아빠가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그 이후에도 해 마다 대학원에 가겠다고 했지만 또 똑같이 화를 내는 아빠 때문에 내 꿈과 목표는 매년 좌절되고 있었다.

 그리고 너무 속상해서 많이 울었던 기억이 있다.

 결국 대학원은 내가 결혼하고 나서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 서른이 넘어 진학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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