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뉴욕주 민사소송 Intake 단계에서 소제기 전까지
민사소송을 업으로 하는 변호사는 매일 누군가의 절박한 사연을 듣는다. 그 과정에서 ‘도와야 한다’는 사명감과 ‘내가 하면 다를지도 모른다’는 오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된다. 간절히 도움을 구하는 사람에게 “당신 사건은 맡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일은 곤욕스럽다. 그러나 사실관계가 지나치게 불리하거나 판례가 명확히 불리한 사건이라면, 변호사는 정직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소송의 기술만큼이나, 거절의 용기가 필요한 이유다.
혹독한 뉴욕의 한겨울, 80대 중반으로 보이는 어르신이 지팡이를 짚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변호사님, 동네에서 눈길에 미끄러져 고관절이 부러졌습니다. 집주인을 상대로 소송을 하고 싶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곧 ‘storm in progress’ 법리를 떠올렸다. 눈이 내리는 도중에는 즉각적인 제설 의무가 면제된다는 예외 규정이다. 건축물 소유자가 제설·제빙을 위해 합리적인 시간을 가질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넘어지실 때 눈이 내리고 있었나요, 아니면 이미 쌓여 있었나요?”
잠시 머뭇거리던 어르신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날은 눈이 내렸다 그쳤다 했어요”라고 답했다.
기상청 자료를 확인해 보니, 사고 시각은 눈이 막 내리기 시작한 때와 겹쳤다.
“넘어진 곳의 눈 색깔은 어땠나요? 하얗던가요, 아니면 검게 얼어 있었나요?”
"눈 색깔은 흰색이었겠지요."
'눈 색깔이 흰색이었다면, 갓 내린 눈이겠지.' 내 머릿속에서는 경고음이 울렸다. 이 사건은 승소 가능성이 거의 없다.
뉴욕주법은 건축물 소유자, 점유자, 관리자에게 부지를 합리적으로 안전한 상태로 유지할 의무(duty of reasonable care)를 부여한다. 보도·주차장·진입로 등에 눈이나 얼음이 쌓여 보행자에게 위험을 초래하지 않도록 제설·제빙과 같은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러나 이 의무에는 중요한 예외가 있다. 바로 ‘storm in progress’ 항변이다. 눈이나 비가 내리는 동안에는 소유주가 즉시 모든 위험을 제거할 의무를 부담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루 24시간 내내 밖에서 제설·제빙 작업을 할 것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폭설·비·우박 등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제설·제빙 의무가 잠시 유예된다. 악천후가 종료된 후 합리적인 시간이 경과하도록 위험을 방치했을 때만 책임이 인정된다.
다만, 이미 존재하던 결빙이 사고 원인이었다면 'storm in progress' 항변으로 면책되기 어렵다. 특히 블랙아이스(black ice)처럼 낮에 녹았다가 밤에 얼어붙은 얼음층은 제설을 소홀히 한 결과일 가능성이 있어, 소유자의 과실로 인정될 수 있다.
뉴욕시 행정법(Administrative Code)은 제설 의무 시간 기준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오전 7시~오후 4시 49분 사이에 눈이 그쳤다면 → 4시간 이내
오후 5시~오후 8시 59분 사이 → 14시간 이내
밤 9시 이후~다음날 오전 6시 59분 → 다음날 오전 11시까지
이를 위반하면 1차 $100~$150, 2차 $150~$350, 3차 이상 $250~$350의 벌금이 부과된다.
‘Storm in progress’ 항변은 객관적이고 확인이 용이한 사실관계에 기반하기 때문에 비교적 단순하고 명료하다. 주로 입증을 위해 필요한 자료는 인증된 기상기록과 이를 뒷받침할 기상 전문가(meteorologist)의 진술서(affidavit) 정도이다. 인증된 기상자료는 과도한 비용이 들지 않으며, 기상 전문가의 진술 비용 역시 다른 분야 전문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다.
이 항변이 가능하다면, 사건을 재판까지 끌고 가지 않고 조기 약식판결(summary judgment)을 신청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피고는 사고 당시 폭설이나 폭우 등 기상 악화가 진행 중이었다는 사실을 증거로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입증책임을 충족할 수 있다. 이 항변은 사실관계에 크게 의존하므로, 사건 당시 악천후를 입증할 수 있는 기록, 목격자 진술, 증언 등 가능한 한 많은 증거를 확보할수록 유리하다.
즉, ‘Storm in progress’ 항변은 단순하면서도 법적 효력이 명확한 강력한 방어 수단으로, 피고는 정확한 기상자료와 전문가 진술만으로도 상당수 사건에서 조기 승소가 가능하다.
나는 결국 이 사건을 맡았다.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미 다른 로펌에서는 거절했습니다. 변호사님께서 제 사건을 맡아주세요.”
그의 간절함에 나는 흔들렸다. ‘내가 하면 해낼 수도 있다’는 오만과, ‘그래도 도와야 한다’는 연민이 교차했다. 응급실 기록에 “사고 당시 눈이 그친 상태였다”는 어르신의 설명이 있어, 이를 활용하여 당사자의 기억을 상기시킨 후 진술하시도록 하면 실낱같은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예상대로, 피고는 일관된 기상자료를 근거로 조기 약식판결을 신청했고, 법원은 피고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피고측 대리인에게 연락하여 항소할 의사를 밝히며, 당사자의 의료기록과 이를 바탕으로 향후 진술이 사실관계의 쟁점이 될 수 있고, 이러한 이유로 법원의 기존 결정이 번복될 가능성이 있음을 피력했다. 동시에 항소 과정에서 피고에게 발생할 소송비용을 감안한 금액을 합의금으로 요구하였다. 설득 과정이 쉽지는 않았으나, 결국 피고측은 이를 수용했고, 다행히 치료비는 가까스로 충당할 수 있는 수준의 금액으로 합의 종결되었다.
약식판결에서 패소한 뒤 어렵게 얻어낸 합의금이었음에도, 어르신은 “합의금은 제 노후자금으로 쓰려고 했는데, 희망이 무너졌습니다”라며 원망을 쏟아냈다. 나는 집주인도, 노후를 책임질 사람도 아니건만, 그 말은 적잖은 불쾌감을 남겼다. 결국, 어르신의 노후자금(?)에 보탬이 되도록 합의금에서 받게 될 내 수임료를 포기하고 전액을 전달했다.
그날 이후, 나는 깨달았다. 승소 가능성이 낮은 사건을 거절하는 것 또한 변호사의 책무임을. 모든 사건을 맡을 의무는 없다는 것을.
원고는 언제, 어떤 상태의 얼음에서 넘어졌는지를 입증해야 하므로, 사고 당시의 기상 기록, 제설·제빙 작업 내역, 현장 사진, CCTV 자료를 최대한 확보해야 된다. 의뢰인이 사고 시각이나 당시 기상 사태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 응급실 도착 시간, 911 신고 내역, 의료기록, 목격자 진술이 단서가 된다.
기상자료는 국립기후자료센터(National Climatic Data Center, NCDC)의 인증본(certified records)을 제출해야 한다. 인증되지 않은 자료는 증거능력이 부족해 서면이 기각될 수 있다. 일반인은 NCDC 웹사이트에서 무료로 자료를 검색할 수 있다.
블랙아이스 사고라면, 현장의 경사도·배수 상태·잔설 여부와 경고 표지 설치 여부를 조사하여 소유주의 주의의무 준수 여부를 확인한다.
*실제 사건 또는 특정인물을 의도한 바 없으며, 각색하였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