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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Jun 12. 2024

습 (濕)

시 poem



난...

습하다

촉촉하고 무거운 공기에 다리는 후들거리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아...
화분을 본다

난... 아버지가 주고 간 난(蘭)

' 키우기 쉽지 않은 데 잘 봐라 ! '

경상도 특유의 남자 목소리...
넓은 거실이 울렁거린다

무언가를 아는 듯한 아버지는 물끄러미 나를 쳐다 본다

' 네... 잘 가꿔야죠 '

초연한 듯 목소리를 삼키니...

이내 들리는 차 시동 소리

' 가시는 구나 '

내가...
대답을 제대로 했던가
아버지께 속으로만 말했었나...

불투명한 기억은 흐릿한 창문이 된다

거실밖 공기가 습윤하다

무언가 떠나가는 소리...

' 난에... 먼지가 있구나 '

조심스럽게 젖은 거즈로 닦고 있으니

창문 틈으로 바람에 날리는 잎들이 운다

이렇게 젖어 들어 흩나리듯 닦여야만
자랄 수 있는 걸까

슬픔이 목 위까지 차오른다
내 곁에 머물다가 떠나가는 모든 것들...

생애 한자락에서
영원한 동행을 맹세한 사람들

약속은 애초에
지킬 수 없기에 가장 연약한 새끼손가락을 내밀었을 까

어지럽다
정신을 차리려 손안의 거즈를 꽉 지어본다
손끝이 손바닥을 잔인하게 찌른다

' 아파요... '

모든 헤어짐에 음성적이라던 그의 도드라진 이별도 어김없이 날 찾아왔다

습윤한 그 흔적을 남기고

바닥으로 떨어진 거즈

나의 온기를 외면한 체

창밖으로 달려 가듯... 그렇게 내 손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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