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그림 앞에 오래 서 있었다.
피카소의 1937년 작 『우는 여인』.
도라 마르 — 여인인지, 유리조각인지, 울부짖는 감정의 구조물인지 알 수 없는 형상.
그 안에는 절규보다 더 무서운 고요함.
그리고 지나치게 선명한 감정의 파편들이 있었다.
얼굴은 해체되고, 눈물은 구조화되었으며,
입은 뒤틀리고, 손은 허공을 움켜쥔 채 멈춰 있었다.
사진작가였던 도라 마르는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그리던 육 주 동안 그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하면서
그의 연인이 되었다.
파리 예술가 사회에서 여왕으로 군림하던 피카소의 연인이라는 달콤하고 영예로운 자리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는 곧 잊혔다.
피카소가 젊은 새 연인 프랑수아즈 질로에게 빠지자 도라는 신경발작으로 무너졌고,
그의 화폭 속에서 고통스럽게 재탄생했다.
그녀는 피카소의 잔혹한 영감이자, 감정의 실험체였다.
『우는 여인』은 그녀의 절망의 기록이 아니라,
사랑이 어떻게 권력으로 변하는가를 보여주는 잔혹한 도큐먼트였다.
그날, 나는 폭락장을 막 지나온 상태였다.
계좌는 파랗게 멍들어 있었고,
모든 것이 산산이 조각난 듯한 심정이었다.
누군가 말했듯이
투자란 결국 감정의 곡선이다.
그리고 그 곡선의 끝엔 늘 ‘눈물’이라는 감정의 벡터가 남는다.
『우는 여인』의 가장 깊은 지점은
울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울음을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이다.
도라 마르의 눈물은 시간 속을 흐르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을 뚫고 정지되어 있으며,
그래서 더 무섭고, 더 섹시하며, 무엇보다도 더 진실하다.
마치 상승과 하락이 반복되는 시장의 파도처럼.
이 그림은 어쩌면 투자자의 초상일지도 모른다.
그래프가 곡선을 그릴 때,
내 감정도 일그러지고,
그 감정은 말 대신 형태로 남는다.
잔속의 와인처럼, 기억은 격렬하지만 고요히 흔들린다.
나는 종종 도라 마르처럼 울고 싶었다.
강렬하게, 일그러지도록,
모든 선을 뒤틀어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숫자 뒤에 숨어 감정을 참았고,
모니터 앞에서 침묵했고,
소리 없는 고통 속에서 감정의 구조를 새로 설계해야 했다.
그것은 일종의 와인 같은 일이었다.
포도가 한계까지 짓이겨지고,
효모가 죽고,
당이 파괴되고,
그 모든 파괴 이후에야 향이 완성되는 것처럼.
투자도 그렇다.
당신의 감정이 부서지지 않으면,
그건 아직 ‘익은’ 게 아니다.
상승장에서 웃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진짜 와인은 슬픔 속에서 향을 낸다.
나는 도라 마르의 눈물 속에서
진짜 투자자의 체온을 읽었다.
피카소가 저지른 가장 가혹한 일은
후세가 도라를 ‘우는 여인’이라는 굴욕적인 이름으로만 기억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녀를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의연하게 붙잡고 버티던,
그러면서도 철저히 자기 자신을 찾으려 애쓰던 여인이었다.
피카소는 그녀를 버리고도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멀리서 고통을 주었고,
그녀는 그 고통을 견디며 ‘인간으로서의 초상’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훗날 도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의 연인이 아니었다. 그가 내 연인이었다.”
그 말을 읽는 순간,
나는 한 병의 와인을 떠올렸다.
아니, 이 그림을 마실 수 있다면 이런 맛이겠다고 느꼈다.
샤토 슈발 블랑 (Château Cheval Blanc 2000).
이 와인은 대담하다.
감정의 격랑과 내면의 복잡함을 고요하게 농축한 예술 작품 같은 와인이다.
하지만 거칠지 않다.
그 안에는 감정이 있다.
단지 술이 아니라,
한 여인이 울고 난 뒤 방 안에 남긴 공기의 냄새가 있다.
짙은 블랙체리와 삼나무, 트러플, 흑연,
그리고 은은한 바이올렛의 향이 서서히 피어오른다.
짧은 행복 뒤에 남겨진 그 알 수 없는 침묵의 맛은
복합적인 서사를 완성한다.
나는 이 와인에서 내 안의 도라 마르를 꺼낸다.
투자자로서의 내 초상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그건 감정의 굴곡 속에서
해체되고, 다시 조립되며,
때로는 그림이 되고, 마침내 와인이 된다.
그리고 나는 안다.
모든 눈물 뒤에는 새로운 색이 숨어 있다는 것을.
모든 하락 뒤에는 다시 그릴 수 있는 곡선이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울 수 있다.
울음이 끝난 자리에 다시 살아갈 이유가 피어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울음 속에서 내 투자 인생의 빛을 보았다.
그날 이후 나는 주식을 고를 때마다
도라 마르의 눈빛을 떠올린다.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통찰의 눈빛이다.
그녀가 울던 이유는 슬퍼서가 아니라,
그 울음 속에서 자신을 다시 찾으려는 몸부림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문장을 마음에 새긴다.
“진짜 투자자는 울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울음 뒤의 빛을 보기 위해 살아간다.”
� 스월링 노트 | 우는 여인, 그리고 투자자의 초상
(‘우는 여인, 그리고 투자자의 초상’을 천천히 마시기 전에 아래 다섯 가지의 질문을 마음속에서 스월링해 보자.)
1. 감정은 왜 가격보다 먼저 무너지는가?
차트는 아직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는데, 나는 왜 이렇게 빨리 지쳐버렸는가.
손실보다도 먼저 무너진 것은 마음의 기울기였다.
2. 슬픔은 투자자의 가장 정직한 증언이 될 수 있을까?
실패를 감춘 수많은 성공담 속에서 진짜 나를 구한 것은
가장 부끄럽고 가장 취약했던 나의 이야기였다.
3. 우리는 정말로 ‘가치’를 보고 매수하는가,
아니면 ‘결핍’을 보며 집착하는가?
그림을 오래 들여다보면 보이는 것은 색채가 아니라 결핍이다.
투자도 마찬가지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좇고 있진 않았는가.
4. 투자와 사랑은 왜 늘 타이밍을 놓친 후에야 선명해지는가?
포지션을 정리한 뒤에야 그 종목의 진짜 가능성을 보게 되는 것처럼.
사랑도 끝난 뒤에야 비로소 그녀의 결을 이해하게 된다.
5. 슬픔은 익어가는 감정인가, 사라지는 감정인가?
피카소의 ‘우는 여인’은 울음을 끝내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 슬픔도 언젠가는 미적으로 완성되는 곡선이 될 수 있을까.
고통이 익는 시간, 그것이 투자자의 내면을 성숙시키는 진짜 시간은 아닐까.
� 추천 와인 : 샤토 슈발 블랑 Château Cheval Blanc 2000
생산지: 프랑스 보르도 생-테밀리옹 그랑 크뤼 클라세 A
품종: 카베르네 프랑 53%, 메를로 47%
스타일: 내면을 직조하는 감성적 카베르네 프랑
구조: 섬세한 텍스처, 은밀한 향, 잔잔한 깊이
� 테이스팅 노트
샤토 슈발 블랑 2000은
생테밀리옹을 넘어 보르도 전체에서 가장 숭고한 빈티지 중 하나로 꼽히는 와인이다.
잔속에서는 깊고도 고혹적인 루비-가넷 컬러가 빛나며,
세월의 흐름이 가장자리의 투명한 벽을 따라 보랏빛 에지를 남긴다.
마치 피카소의 팔레트에 마지막으로 남은 여운처럼 깊고도 응축된 색채다.
첫 향은 잘 익은 블랙체리, 카시스, 자두, 라즈베리의 농밀한 과실이 우아하면서도 강렬하게 퍼져 나오고
곧이어 트러플, 흑연, 그리고 은은한 바이올렛과 아이리스, 장미 꽃잎의 플로럴 노트가
관능적 매력을 더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삼나무, 흑연, 시가 박스, 감초가 모습을 드러내고
숙성이 빚어낸 가죽, 송로버섯, 토양의 그림자가 겹겹이 쌓여 복합적인 서사를 완성한다.
첫 모금에서 블랙커런트와 체리가 농축감 있게 입안을 장악하고
중반부에서는 다크 초콜릿, 커피, 삼나무, 미네랄의 긴장감이
정적인 슬픔 속에서도 살아 있다는 감각의 층위를 드러낸다.
입에 닿는 순간 실크처럼 매끄러운 질감과 구조적 힘이 동시에 느껴진다.
놀라울 정도로 정제된 미네랄과 산도는 고통의 균형을 맞추는 이성처럼 작용한다.
길고 웅숭깊다.
흡사 누군가의 슬픔을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는 그런 여운.
시간이 지날수록 견고함과 우아함이 공존하며, 감정의 프레이밍을 다시 정리해 준다.
한 모금의 끝에서 느껴지는 쓸쓸함은
도라 마르의 눈물을 천천히 들이키는 듯한 여운을 남긴다.
� 추천 이유
샤토 슈발 블랑 2000은 단순히 ‘위대한 와인’이 아니다.
감정의 순도와 회복의 미학을 동시에 담은 작품이다.
피카소의 그림 속 여인 도라 마르는 단순히 눈물을 흘리는 인물이 아니라
고통과 슬픔, 집착과 희망이 뒤엉켜 있는 인간 존재의 초상이다.
이 와인은 바로 그런 복합적 감정의 결을 그대로 담아냈다.
2000 빈티지는 ‘세기의 전환’이라는 의미와 함께 시작된 해이며,
이 와인은 그 시점에서의 감정, 불안, 기쁨, 열망, 상실 모두를 응축해 낸 걸작이다.
특히 높은 비율의 카베르네 프랑은
우울함 속에서도 날카로운 지성을 잃지 않는 피카소의 여인 도라 마르,
혹은 투자자의 이중적인 내면 곧 슬픔과 냉정 사이의 균열을 상징한다.
마치 한 장의 초상화가 보는 이로 하여금 오히려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하듯,
이 와인 또한 마신 이의 내면을 관조하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그러나 슬픔을 위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슬픔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그 아름다움마저 감각하게 만든다.
이 와인은 속삭인다.
“눈물은 단지 슬픔의 잔여물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며 투자자의 초상 속에서 가장 인간적인 빛이다. “
샤토 슈발 블랑은 투자자의 내면 초상을 닮았다.
그건 강렬한 상승도, 절망의 추락도 아니다.
그 중간쯤 어디에서 해체된 감정이 조용히 다시 조립되는 공간이다.
피카소의 『우는 여인』이 감정의 해체라면,
이 와인은 감정의 재조립이다.
그 두 세계 사이에는 동일한 질문이 흐른다.
“나는 무너진 후에도 여전히 나인가?”
이 와인은 그렇게 속삭인다.
“눈물은 패배의 증거가 아니다.
그것은 익어가는 인간의 증거다.”
도라 마르처럼 울고 난 밤, 이 와인을 마신다면
당신의 감정도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잔 안에서 발효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