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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벙, 그리고 부재의 잔향

by 식물감각

그림은 너무나 조용했다.

아찔할 만큼 선명한 파란 하늘,

정리된 수영장의 수면,

그리고 그 정적을 찢고 일어난 물보라

하지만 그 순간을 만든 사람은 없다.

오직 튀어 오른 물의 흔적만이 남았다.

데이비드 호크니의 『더 큰 첨벙 : A Bigger Splash』.

내게 최고의 그림은 호크니가 캘리포니아의 수영장을 그린 이 그림이다.

한 때 나는 추상을 좋아했었고, 그 후 색면추상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추상은 더 이상 밀고 나갈 힘을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호크니의 이 그림을 발견했다.

나는 이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너무나 명료한 장면 속에 숨은 침묵의 폭발에 사로잡혔다.

아무도 없는 장면.

그러나 분명한 행위의 흔적.

"이곳에 누군가 있었다."

그 말이 그림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건 주식의 일봉 캔들 차트 같았다.

극적인 고점과 저점,

한순간의 스파이크,

하지만 정작 그 안의 감정은 보이지 않는다.

남아 있는 것은 수치, 그리고 흔적.

우리는 늘 흔적으로 거래한다.

『A Bigger Splash』는

쾌락의 순간이 지나간 자리의 고요를 그린다.

그리고 그 고요함은

투자의 본질과 닮아 있다.

우리는 늘 결과를 통해 해석한다.

“왜 저기서 뛰어내렸을까?”

그러나 시장은 말하지 않는다.

감정은 사라지고 기록만 남는다.

나는 가끔 상승장 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던 나를 떠올린다.

잔고는 빠르게 늘었고

감정은 빛의 속도로 번졌다.

차트의 곡선은 한낮의 태양처럼 뻗어 올랐고,

나는 그 빛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이 멈췄다.

침묵.

호크니의 수영장처럼,

감정은 사라지고 잔상만 남았다.

그날 밤,

나는 와인을 꺼냈다.

릿지 몬테 벨로 2018 (Ridge Monte Bello)

이 와인은 수영장과 같았다.

단정하고, 선명하고, 깊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첨벙’의 충격이 숨어 있었다.

잔에 부었을 때,

그 농도와 광택, 향과 구조는

너무도 조용한 수면을 깨는 파동처럼 다가왔다.

첫 모금에서 나는 내 과거의 감정을 마셨다.

뛰어들던 순간, 그리고 그 후의 공허.

우리는 흔히 ‘첨벙’에 열광하지만

진실은 언제나 물보라가 가라앉은 뒤에 남는다.

『A Bigger Splash』의 주인공은

사라진 사람이 아니라,

그가 남긴 감정의 흔적이다.

와인도 마찬가지다.

한 잔에 담긴 것은 알코올이 아니라 시간이다.

기쁨, 후회, 향기.

투자 또한 감정의 물보라가 만든 예술이다.

나는 이제 안다.

가장 깊은 투자자는

시장의 파동이 잦아든 뒤

고요한 수면 위에서 감정을 해석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는 말하지 않는다.

뛰어들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의 흔적은 오래 남는다.

마치 좋은 와인처럼.

그리고 호크니의 그림처럼.



� 스월링 노트 | 첨벙, 그리고 부재의 잔향

1. 시장엔 언제나 흔적만 남는다.

감정은 사라지고, 차트만 남는다. 『A Bigger Splash』처럼,

우리는 파동의 증거 속에서 사람을 본다.

2. 가장 짙은 감정은 가장 고요한 그림 속에 있다.

아무도 없는 수영장. 그러나 거기엔 모든 것이 들어 있다.

3. 투자는 기록이 아니라 부재의 해석이다.

진짜 투자자는 사라진 순간이 남긴 여운을 읽는다.

4. 첨벙은 감정의 선언이다.

그 짧은 뛰어듦이 우리를 이끌고, 때로는 파멸시킨다.

5. 잔상 속에서 스스로를 본다.

호크니의 그림처럼 투자의 본질은

사라진 당신의 감정을 다시 읽어내는 일이다.




� 추천 와인 : 릿지 몬테 벨로(Ridge Monte Bello 2008)

생산지 :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 크루즈 마운틴 AVA

품종 : 카베르네 소비뇽 72%, 메를로 17%, 프티 베르도 9%, 카베르네 프랑 2%

구조: 풍부한 탄닌, 생동감 있는 산도, 복합적인 텍스쳐, 강렬하면서도 절제된 우아함

스타일 : 클래식한 보르도 스타일의 미국 프리미엄 레드 와인

� 테이스팅 노트

릿지 몬테 벨로는 캘리포니아 카베르네 소비뇽의 아이콘이다.

잔을 따르는 순간 어두운 루비-퍼플의 강렬함이 압도한다.

잔을 스월링 할 때 느껴지는 깊은 점성은

마치 고요한 수면 위에 드리운 그림자처럼 무겁고 섹시하다.

첫 향은 농밀한 카시스, 블랙체리, 블루베리의 순수한 과실이 터져 나오고

다크 플럼, 건포도, 바이올렛의 플로럴 노트가 입체적으로 드러난다.

시간이 흐르면 시가 박스, 삼나무, 흑연, 감초, 후추와 정향의 향신료가 층위를 쌓고

마지막에는 송로버섯과 젖은 토양, 미네랄리티가 와인의 구조적 긴장감을 고요히 받쳐준다.

잔속에서는 압도적인 힘과 정밀함이 동시에 드러난다.

첫 모금은 강렬하다. 첨벙처럼 입안을 깨운다.

잘 익은 블랙베리와 카시스가 농축감 있게 밀려들고

두 번째 잔은 고요하다.

부재의 향기가 천천히 피어나며

세밀한 탄닌이 골격을 세운다.

입 안 가득 퍼지는 검은 과실의 농도가 인상적이다.

견고한 산도와 탄닌이 처음에는 날카롭지만,

곧 크리미 하게 풀리며 깊은 흙 내음과 미네랄이 섬세하게 스며들어

풍부한 바디와 완벽한 균형을 이루어 무게감 속에서도 자유로운 흐름을 보여준다.

미묘하고도 정제된 떫은맛이 혀끝에 오래 남는다.

피니쉬는 너무나 길고도 느긋하다.

마치 ‘첨벙’ 이후, 아무도 없는 수영장의 수면을 지켜보는 시간처럼.

그 고요 속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가라앉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 추천 이유

호크니의 〈A Bigger Splash〉는 소리 없는 파열, 순간의 폭발, 그리고

그 이후에 남는 정적의 시각화다.

나는 저 선명하고 밝은 색감이 좋다.

이것이 곧 행복의 세계다. 인생 절정의 순간이다.

그림 속 수영장처럼 이 장은 ‘무엇인가 벌어진 뒤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말해준다.

이 와인은 그런 침묵의 여운과 감정의 여백을 담아내는 와인이다.

첫 모금은 강렬한 ‘첨벙’처럼 입안을 강타하지만,

두 번째부터는 사라진 흔적, 잔향, 그리고 부재 속의 아름다움이 천천히 올라

그것은 단지 맛이 아니라

한 잔의 술이 가져다주는 내면의 파문이다.

투자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수익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격동의 물결 이후,

남는 것은 숫자가 아니라

내가 감지한 움직임, 내가 감당한 침묵, 그리고 나만의 리듬이다.

릿지 몬테 벨로는 와인 메이커 폴 드레이퍼의 혼이 담겨 있는 와인이다.

그는 밸런스, 섬세함 그리고 풍성한 향미를 갖춘 와인의 매력을 설파하는 전도사였다.

‘클래식 보르도 스타일’이라는 외피 속에

캘리포니아 산맥의 고독한 품위를 품고 있다.

그래서 이 와인은

‘첨벙’이라는 짧은 순간보다,

그 이후, 아무도 없는 수면 위에 남는 빛의 잔향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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