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가대를 서는 이유
성가대를 섰다. 주일학교 교사를 6년간했고, 이사를 와서 교회에 출석하면서 어떤 봉사를 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 내 딴에는 남편과 같이 봉사하고 싶어 성가대를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교단 신학대를 다니고 있어 주일학교 교사를 해야만 되나 하는 내적 갈등이 있었던 와중에 현, 성가대 대장님께서 내게 전화번호를 주셨다. 어느 주일, 11시 대 예배가 끝나고 막 나오려는 차에 일자로 자른 앞머리에 쇼커트, 일명 바가지 머리를 하신 마구 귀여워 보이시는 성가대원 한 분이 성가대를 꼭 같이 섰으면 좋겠다고 포스트잇에 전화번호를 적어서 주셨다.
그 뒤로 2주동안 고민을 했다. 주께 어디든 부르시면 가겠습니다 라고 금식기도를 하고 있는 중이었고, 무슨 길거리 캐스팅도 아니고 불쑥 찾아 온 기회에 당황했지만, 기회는 사람을 통해 찾아온다고 무수히 들은 바가 있어 고민을 길게 하지는 않았다. 2주간의 고민이었던 이유는 남편을 설득하기 위함이었다. 우리 나이가 이제 마흔 중반이고, 20-30대 청년들이 많은 곳에서 봉사하는 것보다는 우리 연령대 보다 나이가 많으신 분들과 어울리는 편이 낫겠다 싶기도 했다. 그러나 남편은 확고하게 거절을 했다. 마침, 그 때 두 아이 모두 성가대며 찬양팀이며 봉사를 하기 시작한터여서 남편의 거절이 서운했지만 외롭지는 않았다.
성가대를 서면서 좋은 점은 연습의 자리에 있는 그 자체가 은혜라는 점이다. 찬양을 하면서 찬양을 들으면서 가사를 통해 멜로디를 통해 감동 또 감동이다. 울먹거리면서 찬양을 부른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물론, 프로라면 감정을 빼고도 표현을 잘 해내야만 하겠고 수도 없이 무대에 서면서도 실력에 흔들림이 없어야 하겠지만, 난 철저하게 그렇지 못했다. 시도 때도 없이 울컥거리고 고음 불가에 퍽하면 삑소리가 났다. 성가대 대장님 뒷자리에서 누가 듣던지 말던지 맘껏 이렇게 찬양을 불렀던 실력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이런 내게 왜 전화번호를 주셨는지 모르겠지만, 지금껏 남편의 말대로 ‘은혜’로 성가대에 서고 있다. 집에서 목 놓아라 연습을 할 때면 아이들은 내게 ‘엄마! 목소리 엄청 크다.’ 고 타박을 주기도 했지만, 남편은 그런 아이들을 나무라며 열심히 좋아서 하는 내 편을 들어주었다. 닭 목가지를 비틀던지 메달던지 차에서도 집에서도 참으로 성심성의껏 열의를 다해서 지금도 연습을 하고 있다.
두번째는 가르침의 일방적 자리보다는 들음이라는 자리 임을 배우게 되었고, 튀는 법 보다는 어울림을 배우게 되었다. 내 목소리는 가늘고 카랑거리며 소리를 높이 지르면 귀에 상당히 거슬리는 소리다. 맑은 청량한 소리라고 누군가는 그러시기도 했지만 난 내 목소리가 조금 더 낮고 허스키하고 굵었으면 했다. 마흔 중반에도 아이 같은 목소리가 싫을 때가 있어 일부러 요즘은 저음으로 아이들을 부르면 그 노력도 모르고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잔소리를 듣는다.
아무튼 이런 내 목소리는 합창에서 참으로 별로다. 매주 교회에서 대예배 때 성가대 찬양을 동영상 편집을 해서 성가대 단체카톡방에 올려주시는데 내 목소리만 들리는 것만 같아 얼굴이 화끈거릴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목소리를 질러대지 않고 주변을 들으면서 조화로운 흐름에 묻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우리 성가대는 20대 청년부터 70대 권사님, 장로님들까지 다채로운 나이와 목소리 색깔이 형형색색으로 한 목소리를 낸다. 그 흐름에서 튀고 싶었던 초반의 나의 교만은 부끄러움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합창은 한 목소리를 낼 때 정말 아름답다. 자랑을 아끼고, 타인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법에 익숙해질 때 찬양은 고운 소리를 냈다.
기회는 예기치 못한 행운처럼 올 때도 있다.
또는, 기회는 오랜 기다림의 과정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알아차리기 힘든 경우도 있다.
내가 선택의 기로에서 기다리지 못했던 무수히 많은 경우에도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위해 먼저 사자를 앞서 보내셨다.
그러나 그 때의 나였다면 기다리지 못한 벌컥의 선택에 전전긍긍의 근심으로 기도했겠지만, 지금은 거대한 파도를 기다리는 서퍼처럼 기다려보려고 한다.
내게 그 하나님의 잠시가 하루 일 수도 일주일 일 수도 한 달이 될 수도 1년이 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아주 잠시 일 뿐인 그 시간을 평정심을 갖고 기다려보려고 한다.
모든 것은 순리대로 갈 때 모두가 평안하다.
내가 신학 공부를 하고 부르심을 기다렸지만, 하나님께서는 갑작스레 성가대를 제안하셨다.
그 날도, 나의 찬양이 저녁 식사 시간 수다거리의 반찬이 되었다. 남편은 아이들에게 엄마를 놀리지 말라고 편을 들어주었다. 아이들은 그런 아빠에게
“아빠도 엄마랑 같이 성가대 서면 좋겠다.”
“아니야. 난 준비되면 찬양팀으로 다시 설거야.”
그의 말에 아이들과 나는 멈칫했다. 마음 한 켠에서 뜨거운 것이 북받쳐 올라왔다.
문득,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남편을 기다리고 계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오랜 방황을 나는 좀 더 기다려보려고 한다. 그를 기다려 온 모든 시간이 기회를 만들었던 과정이었을 거라는 기분 좋은 확신이 들었다. 내가 신학을 공부했던 것은 내가 성가대를 선 것은 그의 회복을 위한 밀알이지 아니었을까.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위한 밀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