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고마워"
시집 삽살개 섬기기
일찌감치 친정에서 가르치길, 시집 섬기기를 삽살개도 존칭으로 받들라 하대요.
지금 생각해 보면 유독 충청도에서 심했던 풍습이 아닌가 싶어요. 점잖고 예의 바른 충청도 양반이라서? 글쎄유... 혹시 융통성 없이 고지식해서는 아니고? 끄덕끄덕.
아무튼 그렇게 듣고 자란 제가, 무려 8남매 종가 시집의 맏며느리가 됐습니다. 시동생과 시누들 일곱 명이 아래로는 세 살, 네 살까지 조르륵 있네요. 아낌없이 존대했죠. 배운 그대로.
"이러시고, 저러시고, 잡수시고, 주무시고."
심지어 외양간에 소가 한 마리 있었는데, 그 소한테도 "소님께서 덕석님을 입으셨네요. 소님 머리에 검불님이 붙었구먼유." 그랬답니다. 예의 바른 척, 능청을 가장한 반항이었으려나.
어느 날 저녁밥을 지어놓고 밖에서 놀고 있는 막내 시동생을 향해 "도련님~" 하고 불렀어요. 돌아보는 시동생에게 "진지 잡수세요." 했더니, 대문 뒤에 숨으면서 "아잉~" 하며 부끄럽다는 듯 겸연쩍은 투정을 부리더라구요.
그 모습을 시아버님께서 보셨어요. 껄껄 웃으면서 제게 하시는 말씀.
"그냥 이름을 불러도 된다."
세 살이었던 막내 시누이는 참 깜찍하고 예뻤어요. 나이 많은 지금도 한 미모 합니다.
막내 시동생은 제 존대말을 어색해했지만, 막내 시누이는 그럴 때마다 까르르 웃으면서 "응, 새언니" 하고는, 제 치마폭에 매달려 응석 부리던 모습이 얼마나 이뻤는지 모릅니다.
우리 신랑은 "꼭 그렇게 존댓말로 해야 하는겨?" 하면서 빙긋빙긋 웃기만 하더군요.
지금 떠올려보면 참 아득했던 시절의 기억입니다. 그렇게 시댁 식구들과 웃으며 지냈고, 남편의 은근살뜰한 사랑 덕분에 순간순간 매서웠던 시집살이 3년을 버텼답니다.
듬직하게 아빠를 보내드린 상주
제가 혼례를 치른 지 불과 3년 만에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큰오빠는 신랑보다 한 살 위, 둘째 오빠는 신랑보다 한 살 아래였어요. 나란히 한 살 차이인 세 명이 상주를 했죠. 제 오빠들은 귀한 늦둥이로 태어나 귀여움만 받으며 크다 보니 철없다는 소리를 듣는 편이었고, 큰사위는 듬직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세 남자가 나란히 상주가 되어 삼일장을 모시는데, 오빠들은 천진한 반면, 사위는 의젓한 모습으로 사흘 내내 잠도 전혀 자지 않으며 자리를 잘 지킨다고, 그곳에 모인 어른들한테 칭찬이 대단했답니다.
오죽하면 올케들조차 듬직한 우리 신랑이 부럽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발인제를 하던 마지막 날, 식구들의 곡소리와 함께 제를 모시는데, 축문 순서가 되어 모두 잠시 곡을 멈추고 축문 낭독을 기다려요. 큰사위인 제 신랑이 축문을 읽기 시작합니다. 종갓집 5대 장손인지라 축문 읽는 소리는 원래부터 소문나있던 우리 신랑.
상주인 저도 살짝 고개를 들어 그 모습을 봤죠. 삼베 두루마기를 입고 축문을 읽는 모습이 어찌나 든든하던지, 잠시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잊을 정도였답니다. 그러다가 그만 눈물이 들어가 버려, 그 후에 곡을 이어 나가기 힘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무사히 장례를 마치고 온 집안 식구들이 모인 자리. 슬퍼하는 우리 어머니한테 하시는 말씀들이, 그래도 망인께서 너무 늦지 않게 딸 시집 보내 듬직한 사위 얻고, 원도 한도 없이 잘 가신 길이었다며 어머니를 위로해 주십니다.
제 마음도, 제 남편이 함께 애쓴 힘으로 아버지 가시는 길 잘 모셨다 싶으면서 많이 위안이 되었답니다.
신혼의 한밤을 깨운 방귀 소리
저는 지금도 그렇지만 어릴 때도 처녀 때도 방귀를 잘 뀌었어요. 천방지축 어디 가겠어요. 한번은 그러는 저를 보고 엄마가 호되게 나무라며 겁을 주시대요.
“너, 그리 헤프게 방귀 뀌다가는 시집가서 하루도 못 살고 서방한테 소박맞아 쫓겨온다.”
저는 서방이라는 게 엄청나게 무서운 사람인가 보다 생각했어요.
시집간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공무원인 신랑이 일거리를 잔뜩 싸가지고 집에 왔어요. 다들 야근을 하게 됐는데, 제 신랑한테는 새 각시 독수공방시키지 말고, 집에 가서 하라고 했다네요.
남편은 일에 몰두하고, 저는 옆에서 바느질을 하면서 조용한 밤이 깊어 가고 있었는데, 저도 모르게 그만, 늘 하던 짓 또 했네요. 저한테서 ‘뽕~’ 하고 작은 방귀가 나온 거예요. 고요한 밤, 신혼방에 울려 퍼지는 낯선 소리. 남편이 “어허, 서방님 앞에서...” 하며 웃습니다.
처녀 때 엄마가 하던 말이 저절로 떠오르면서 ‘아, 이제 소박맞고 쫓겨나는 순서인가?’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는데, 남편은 계속 웃기만 할 뿐 더는 말이 없더라구요.
도리어 제가 그랬죠. “이제 보니 서방이 그렇게 무서운 사람은 아니네.” 그러면서 처녀 때 제 엄마가 했던 말을 들려줬어요. 남편이 또 웃으며 그러더군요. “막상 해보니 안 무서워?” 그렇게 둘이 한참을 웃었고, 나중에 친정엄마와 올케들한테 그 이야기를 하며 또 웃었답니다.
남편 앞에서 방귀? 아내는 뀌어도 됩니다! 소박? 어림도 없어요.
남편이 말없이 멈춰 세운 도리깨질
대가족 종갓집 맏며느리로 시집가면서, 한편으로 '아, 내가 이제 큰 가족의 식구가 되는구나!' 하는 설렘도 있었답니다.
그런데 막상 시집살이를 시작하고 보니, 부엌일은 물론이지만, 어른 모시는 일부터 어린 시누이, 시동생 키우는 일에, 논일 밭일까지 어찌나 잠시도 쉴 틈 없이 일이 많던지, 남편하고 살러 온 시집인지, 식모살이, 종살이를 하러 온 시집인지 분간이 되질 않는 지경입니다.
‘이건 아니다’ 싶던 어느 날, 보따리를 싸 들고 아무도 몰래 집을 나섰습니다. 일부종사의 믿음이 확고한 엄마 때문에 바로 앞에 있는 친정에는 못 가고, 십 리 넘는 길을 걸어 친정 큰집에 갔답니다. 그 시절 새 색시가 무려 '가출'이라니.
깊은 산골, 그야말로 하늘만 빠꼼하게 보이는 두메산골 집이었죠. 그곳에서 며칠간 그 동네 새댁들 사는 모습을 지켜보니, 당시 어른들 하던 말로 마치 '불에 찌든 강아지처럼' 정말 엄청나게 힘든 삶을 살고 있더라구요.
‘나는 양반이었구나' 제 시집살이와는 비교할 수 없이 고돼 보였어요. 인생사란 다 이런 건가 싶은 생각도 들고, 사촌 올케의 위로도 들으면서 마음을 정리하고 있는데, 며칠 후 남편이 저를 데리러 왔어요. 반갑더군요. 못 이기는 척, 남편 손을 잡고 시댁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시댁에서의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어요.
보리타작할 때가 됐는데, 어느 날 시어머니께서 저보고 도리깨질을 하라네요. 평생 안 해본 서툰 도리깨질을 하다가 그만 제 발목 복숭아뼈를 때렸습니다. 순간 숨이 턱 막히면서 비명도 안 나오대요.
그날 밤, 남편에게 시퍼렇게 퉁퉁 부은 발목을 내보이며 아주 서럽게 울었습니다. “내가 평생 해보지 못한 보리타작이나 하러 시집온 거 맞아?” 하면서요.
다음 날 점심, 뜬금없게 남편이 집에 왔어요. 말없이 제 손에서 도리깨를 뺏어 점심시간 내내 도리깨질을 하고는 직장으로 돌아갑니다. 점심밥은 먹고 온 건지도 모르겠는데, 마치 할 일 다했다는 듯.
저녁이 됐어요. 웬일인지 일찍 퇴근한 남편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가서 저녁이나 지어” 하면서 또 도리깨를 뺏어갑니다. 그러기를 이틀을 지나고 나니, 이제는 제 남편이 보이기만 하면 시어머니가 먼저 제 손에서 도리깨를 뺏어가네요.
나흘째 되던 날, 또 신랑이 나타나는 걸 본 시어머니가 제게서 다시 도리깨를 뺏어가더니, 그 이후 아예 다시는 도리깨질을 시키지 않더라구요.
고된 시집살이였지만 그래도 버텨낼 수 있었던 건, 온전히 남편의 은근하고 살뜰했던 사랑 덕분이 맞습니다.
"남편,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