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퇴근길 골목 그 리어카 호떡
시골 소녀 처음 타는 기차놀이
“저기 철구렁이 한 마리 지나간다!”
지난 글에 말씀드렸었죠. 시골 깡촌 소녀가 생애 ‘처음으로' 기차 구경을 한 게 6.25 전쟁통 속 국민학교 소풍날이었다고요.
기차를 꼭 보고 싶다는 아이들 소원을 들어주려고, 마을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 데려가 멀리 지나가는 기차를 보여주던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이 지금도 느껴집니다.
「"기차를 보고 싶어요"」 바로가기
그 촌 소녀가 커서 시집을 가고, 첫 아이를 낳고, 뱃속에 둘째를 가지고 있던 해. 마침내 그 철구렁이를 ‘처음으로' 직접 타 보게 됐답니다.
집 앞 면사무소의 말단 공무원. 젊은 ‘면서기’였던 남편이 국가고시에 합격을 했어요.
5.16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가, 경제개발 5개년계획 시작과 함께 실시한 일종의 국가공무원 특채 시험이었는데, 거기에 덜컥 합격을 하더니 문교부 서울 본청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남편은 서둘러 서울로 먼저 올라갔고, 근무 한 달 후 받은 첫 월급으로 사글셋방을 구했다면서 저도 빨리 올라오라는 편지를 보내왔어요. 가난한 충청도 종갓집 5남 3녀 장남의 맏며느리로, 매웠던 시집살이 만 3년 만에 해방되는 기적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이 서울로 올라간 진짜 속내가 서울 문교부 공무원이 아니었다는 건 곧 밝혀지게 됩니다.
우리 마을에 경사 났다고 떠들썩한 온 동네 축하 분위기 속에서, 제 친정에서는 우리 큰딸 시집살이 면했다고 만세를 부르며 기뻐했지만, 정작 주인공인 시댁 분위기는 몹시 우울했답니다.
집안의 기둥이던 맏아들, 맏며느리를 떠나보낸다는 상실감이 기쁨보다 더 컸던 게죠. 그때까지 제 집 밖 노동, 집 안 노동이 만만치 않았어요. 당장 막내 시동생, 막내 시누이는 거의 제가 키우고 있었고요.
그런 분위기인지라 저는 기쁜 내색을 조금도 보일 수 없었고, 밤마다 혼자 두근대며 몰래 조금씩 짐을 꾸렸습니다.
첫 번째 서울 먹거리, 2원 50전짜리 '가락국수'
마침내 서울로 떠나는 날이 왔어요.
설레임으로 맞이한 어스름 새벽, 저는 큰딸을 업은 채 시아버지와 함께 버스를 탔습니다. 그때까지 공주 촌마을을 벗어나 어디 한번 멀리 가본 적 없는 제가 서울까지 혼자 갈 수는 없었거든요. 남편은 서울역에 마중 나와 있기로 했고요.
조치원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던 그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제 친정엄마는 함박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연신 손을 흔들었지만, 시어머니는 아예 통곡을 하시느라 잘 가라는 인사조차 못하더군요.
조치원역에서 드디어 어릴 적 먼발치에서 보았던 철구렁이에 ‘처음으로' 올라탔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이 마주 앉아 있다는 게 참 어색하더군요. 천안을 지난 기차가 연착을 합니다. 그 시절 기차는 늘 그랬던 곳에서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30분 이상씩 연착하고는 했어요. 시아버지가 내리시더니 낯선 국수를 사 오시더군요. ‘우동’이라 부른답니다.
저는 ‘우동’이라는 걸 생전 ‘처음’ 봤습니다. 공주 장터에서도 ‘국수’만 봤지, 그런 건 본 적조차 없었어요.
너무너무 맛있더군요. 시골에서 멸치육수에 별다른 고명도 없이 간장양념 한 숟가락 얹어 먹던 가는 국수 면이 아니라, 어묵 한 조각이 곁들여있는 일본식 다시와 어묵육수 맛이 끝내줘요.
처음 보는 굵은 우동 면은 퉁퉁 불어있었지만, 그것조차 맛있더라구요. 당시 2원 50전이었던 기차 연착우동. 이십 년쯤 지나니 제가 처음 기차에서 먹었던 건 ‘가락국수’, 시골에서 먹었던 건 ‘잔치국수’, 이렇게 이름표가 바뀌었죠.
두 번째 서울 먹거리, 2원 50전짜리 '카스테라'
제 첫 서울집인 동대문구 신설동 사글셋방에 도착했습니다.
비록 손바닥만 한 단칸방이었지만, 이제 여기서 우리 가족만의 신혼 살이가 시작되는구나 생각하니 마냥 행복했죠. 하지만 착각이었습니다. 서울 객지살이는 삭막했어요.
시골 고향에서는 집 앞 면사무소에서 근무하는 남편이, 점심에 밥을 먹으러 오기도 하고, 보고 싶을 때마다 볼 수 있었는데, 하루 종일 남편 구경도 못하고 그저 기다리는 것만이 제 일입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타향 객지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수다를 떨 상대도 없고요,
그 와중에 큰 위로가 됐던 건 퇴근길 남편 손에 늘 들려있던 ‘카스테라’입니다. 제가 서울 덕분에 ‘처음’ 보게 된 두 번째 먹거리죠.
당시 남편의 근무지 문교부는 종로구 적선동에 있었고 그곳에서 버스를 타면 집까지 한 번에 올 수 있었어요. 버스값은 5원. 하지만 남편은 광화문까지 걸어와 전차를 탔어요. 신설동까지 오는 전찻값은 2원 50전.
그렇게 아낀 2원 50전으로 남편은 매일 카스테라를 사 왔답니다. 카스테라 한 개도 2원 50전.
서울에 와서야 ‘처음’ 구경한 카스테라의 맛. 겉은 고실고실하면서 속은 포근포근, 쫄깃쫄깃한 게 정말 환상이었죠.
하지만 임산부 처지면서도, 그 카스테라가 온전히 다 제 몫은 아니었어요. 그때 막 젖을 떼고는 먹는 게 부실했던 큰딸을 위한 간식이었답니다. 딸이 어찌나 그걸 맛있게 먹던지,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제 배가 불러왔기 때문이죠.
그해 크리스마스 다음 날 연년생 아들을 낳고 나니, 그때부터는 남편이 두 개씩 사 오더군요.
잊지 못하는 마지막 서울 먹거리, 1원짜리 '리어카호떡'
역시나 서울에서 ‘처음’ 봤고, 60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 잊지 못하는 맛은, 신설동 골목 리어카에서 사 먹던 ‘호떡’입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남편을 신설동의 퇴근길 골목에서 기다립니다. 우는 딸 때문에 주인집 눈치 보는 것도 힘들었기에, 해만 지면 집을 나와 배는 남산만큼 부른 채로 딸아기는 등에 업고 추운 길에 서서 하염없이 남편을 기다리죠.
그 골목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리어카를 끌고 오는 아저씨가 있었어요. 리어카 안에는 연탄 통 하나가 실려있는데 그 위에 팬을 놓고 동그란 반죽을 계속 올려가며 굽더라구요. 처음 보는 재밌는 풍경이었죠.
부침개도 아닌 반죽 모양과 고소한 냄새가 하도 궁금해서 "이게 뭐죠?" 하고 물었어요. 별 걸 다 물어본다는 듯 갸웃거리더니 ‘호떡’이랍니다.
만들기 크게 어려워 보이지도 않는 호떡. 왜 제 고향 시골에는 호떡이라는 게 없었는지 지금도 궁금합니다. 공주읍 큰 장터에서조차 부침개, 찐빵, 만두, 쑥개떡은 있었지만 호떡이란 건 없었어요.
그 냄새를 참다못해 어느 날 사 먹었습니다. 한마디로 죽여주는 맛이더군요. 지금 애써 기억해 보면, 고소하고 바삭하게 부서지는 겉반죽의 맛은 마아가린을 살살 발라서 구웠던 것 때문 같고요. 깔끔하고 담백했던 속 맛은 별다른 고명 없이 살짝 넣었던 설탕 때문 같습니다.
임산부라 더 맛있었는지도 모르죠. 두 개도 못 사고 한 개 사서 등에 업은 아기하고 나눠 먹으면 어찌나 맛있던지요.
남편 월급날 되면 실컷 사 먹어야지 했지만, 막상 그렇게 해본 적은 없고, 일주일에 딱 한 개씩 사 먹었답니다. 당시 그 호떡값이 1원인가 1원 50전인가 그랬는데, 남편 월급날이면 늘 시댁에 생활비와 대소사 비용을 보내느라 참 가난한 부부였거든요.
10월 초에 상경한 제가 12월 끝 무렵에 둘째를 낳았는데 아들이었죠. 아들도 낳았으니 이제 호떡을 실컷 먹겠노라 생각했는데, 산후조리가 시원치 않았는지 미역국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는 지경이 됐네요.
걱정하는 남편한테 "여기 골목에 죽여주는 리어카 호떡이 있긴 한데..." 했더니, 바로 나가서 한 봉투 잔뜩 사 옵니다. 그런데 이미 단단히 병이 난 몸인지라 그 맛있는 호떡을 잘 못 먹겠더라구요. 크게 후회했죠.
"아, 애 낳기 전에 많이 먹을걸."
그 뒤로 60년. 전 그 맛이 나는 호떡을 먹어본 적이 없어요.
요즘은 거의 기름에 튀겨낸 호떡. 설탕 듬뿍도 모자라 온갖 고명으로 가득 차서, 어설프게 먹다가는 고명 범벅이 옷에 뚝뚝 떨어지는 눅눅하고 기름진 호떡이 대부분인 것 같더라구요. 제 입에는 안 맞아요.
한복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동대문 원단 시장을 자주 다녔습니다. 한 바퀴 돌고 허기가 지면 신설동 그 골목을 찾아가곤 했어요. 그때 우리 살던 동네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지만, 호떡집은 몇 곳 있더라고요. 그런데 어느 집 호떡도 그 맛은 아니었습니다.
서울 덕분에 처음 먹어본 가락국수와 카스테라는 지금도 맛있는 곳이 꽤 있지요. 다만 제 첫 기억 속의 맛보다는 덜합니다. 아마도 그건 제 추억이 더해진 맛이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호떡만은 그 맛 자체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건 가난했던 새댁 임산부의 추억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요.
오늘도 그립습니다.
그때 서울에서 처음 먹어본, 남편의 퇴근길 골목 그 호떡.
1960년대 초반, 신설동 전차 정거장 앞 골목. 리어카 위 연탄 통에서 매일 호떡을 구워주시던 아저씨, 다시 한번 만나볼 수 있을까요?
"아저씨, 여기 리어카에 있는 호떡 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