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어느 가을날
두 번째 신혼, 서울
충청도 공주의 작은 마을에서, 8남매 종가집 맏며느리로 시집가서 꼬박 3년을 그 큰 집 시집살이를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을 따라 서울에 올라오게 됐죠.
친지들은 딱히 연고도,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 타향에서 어떻게 살 거냐며 걱정들을 해댔지만, 저는 그저 남편 손 하나 꼭 잡고 생전 처음 서울 가는 길이 설레고 좋기만 했답니다.
비록 작은 사글세방이었지만 기대했던 대로 그때부터가 진짜 남편과의 신혼 시작이었습니다.
하지만 힘들었어요. 남편과 둘이 있는 시간은 달콤했지만,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그저 아이 둘과 부대끼며 남편 귀가만 기다리는 생활은 참 외롭더군요.
감정 표현을 거의 하지 않는 남편은 평소 별말이 없었지만, 늘 그런 저를 많이 신경 쓰고 있었더라고요.
남편에게도 낯설었을 객지 타향에서의 고된 생활 중에 만나는 좋은 곳, 맛난 것이 있으면 제게도 경험시켜 주려 하는 게 저에 대한 남편의 배려였습니다.
첫 경험, 강렬했던 매운맛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가을 초입의 어느 날.
출근하는 남편이 제게 "저녁 6시까지 광화문 동아일보사 정문 앞으로 와" 하더라고요. 남편 회사가 광화문 근처였죠. 무슨 일 때문인지 물어봐도 그저 와보면 안다네요.
종일 궁금해하다가 뭔가 두근거리는 마음을 누르며 전차를 타고 도착하니, 기다리고 있던 남편이 또 말없이 앞장을 섭니다. 남편을 따라 들어선 곳은 무교동 뒷골목의 어떤 낙지요리집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지만, 나중에 한참 유명해진 무교동 낙지골목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특정 요리를 대표하는 요리골목의 시작이 무교동 낙지였던 것 같아요. 장충동족발, 오장동냉면... 이런 것들처럼요. 또한 매운 외식 요리의 시작이기도 하고요.
아무튼 제게는 별세계였어요.
매콤한 낙지볶음 냄새가 자욱한 작은 낙지집에 사람이 빼곡하게 차 있는데, 게다가 여자는 저 혼자뿐인 거예요. 뭔가 그 기세에 눌려버린 촌 여자가 어리바리하게 있는데, 큰 접시 가득 낙지볶음이 도착했죠.
한점을 집어 먹고는 그만 비명을 지를 뻔했어요. 어찌나 맵던지 눈을 뜰 수가 없을 정도였죠.
그 모습을 웃으면서 바라보는 남편.
"어서 먹어. 먹다 보면 맛있을 거야".
처음 들어섰을 때의 어색함, 그리고 이어진 매운맛의 충격에 어떻게 마저 먹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나중에 남편이 시켜준 밥 한 공기에 낙지 양념을 비벼 먹으니 그나마 먹을 만하더군요.
낭만 가득 서울의 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 걱정에, 촌 여자의 무교동 낙지 첫 경험을 서둘러 정신없이 끝내고 돌아왔는데, 어떻게 된 건지 그다음 날부터 자꾸만 그 골목이 다시 그리워집니다.
매일같이 그 얘기를 했더니 한 달쯤 지난 후 결국 남편이 또 나오라고 하네요. 두 번째로, 무교동 낙지골목행 전차를 또 탔습니다.
이번에는 익숙한 서울 여자처럼 여유 있는 척하며 다시 낙지집에 들어섰어요. 지난번에 매워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저를 위해, 남편은 낙지볶음에 더해서 낙지탕을 추가로 주문해 주더군요. 하나도 남기지 않고 아주 맛있게 먹었어요.
서울의 단골 새댁인 양 굴어야 했고, 분명히 닥쳐올 자랑의 순간을 구체적으로 준비해야 했기에, 이번엔 두 눈을 뜨고 천천히 살펴보며 맛을 즐겼습니다. 꼼꼼하게.
마치 큰 문어를 잘라 놓은 듯 아주 굵직굵직한 낙지가 어찌나 탱글탱글 쫄깃한지 정말 행복한 식감이었고, 함께 곁들여 먹는 콩나물의 아삭함이 그야말로 찰떡궁합입니다. 보기에도 먹기에도 푸짐한 차림에 눈도 입도 즐거워지고요.
제가 먹는 걸 조용히 옆에서 챙겨주던 남편이 이제 밖에 나가자고 합니다. 광화문이 어딘지, 무교동이 어딘지도 제대로 모르던 저를 데리고 오늘은 좀 걷자네요.
청계천, 종로를 걸으며 자기가 일하는 건물도 알려주고, 세종로를 따라 광화문까지 이곳저곳 설명과 함께 광화문 구경도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남편과 서울 도심 산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남편 하는 말이 "어, 조금 있으면 통금 온다. 빨리 가자" 하네요. 그제서야 집에 있는 아이들 생각도 납니다.
부랴부랴 정신 차리고 집에 돌아와 대문을 들어서는데, 막 통금 사이렌이 울리더군요. 큰일 날 뻔한 거죠.
남편과의 두 번째 신혼 시절, 서울의 어느 가을날.
지금은 아득하기만 하지만, 서울하고 조금은 친해졌던 낭만의 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