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진다 흔들리며 결국 떨어진다 아무것도 한적 없던 것처럼 피어난 적 없던 것처럼 처연한 낙화에는 아쉬움일랑 없다 변한다 점점 흙이 되어간다 필시 져야 할 때를 앎이 틀림없었다 그래야 계절들이 온다는 것을.. 그것의 이유 있음을..
사람들이 다 잊은 날, 봄을 짐작할 수 없는 날에도 때가 차면 좁다란 멍울 안에서부터 꽃은 터져 나온다 또 꽃나무의 기약은 그것을 기다리는 세상에 대한 결연한 맹세와 같았다 겨울을 힘들게 났을 벌과 나비가 가벼운 날갯짓으로 날아든다 봄이 오면 이 땅에 숨을 내쉬는 것마다 특별한 생기를 갖는다 사랑을 하고 만나고 자리에 앉는 곳마다 도란도란 지난 시간들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허공에서 맞는 시선에 마음은 제멋대로 일렁였었다
지난겨울은 가히 춥고 음울하고 고독했다 바람이 거셌고 그것이 어디로부터 불어왔는지 언제 멈출는지 몰랐다 불안했었고 철저히 온기와 단절 돼있었다
그래 간혹 이 모든 게 힘에 겹더라도 달갑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했다 생에는 이겨내야 하는, 불안하지만 묵묵히 걸어가 봐야 하는 그런 시기가 있고 우리는 흔들렸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끝이 있었다 우리는 내일을 좇는 존재들이고 끝에 닿으려 했고 또 그 너머에 목적이 있었다
봄이면 꽃그늘 아래 하늘이나 보고 앉아 있곤 했다 콧노래라도 새어 나올 것 같은 날. 모든 살아있음을 관망하는 날. 누군가 어깨를 톡 쳐서 고개를 돌려보면 하얀 봄하늘 뒤로 하고 미소 짓고 있는 당신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