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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막 익숙한 얼굴(完)

불의 나비 79화

by 매화연

내 말에 태윤이 다시 한번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러더니 곧이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밤하늘에 대해 알 권한이 없다. 속성 보유자 중에서도 밤하늘의 존재 자체도 모르는 자가 있을 만큼 철저히 숨기고 감추는 곳이다.


태윤도 업무를 위한 간략한 것만을 알 뿐이었다. 그조차도 태윤에게 불필요한 정보를 누설하지 않도록 조심하는데 아무리 밤하늘 관리자인 나의 친동생이라 한들 별 방문 날짜는 물론 그 어떤 것도 알아서는 안 된다.


태윤이나 태혁을 못 믿어서가 아니었다. 세계와 전설의 인정을 받은 속성 대표가 아닌 이상 그들의 관할인 밤하늘에 대한 정보라도 자칫 잘못 알게 된다면 내가 감당해야 될 후폭풍이 그들에게까지 영향을 줄 수 있을 테니까.


이해는 한다. 상사의 남동생, 그것도 자신의 상사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이 묻는데 대답을 안 해줄 수 있을 리가.


“되었다. 거기에 신규 디자인 기획서가 있느냐?”


책상을 둘러보던 태윤이 위에 있는 기획서들을 가져와 나에게 건넸다.


“여깄습니다. 그, 오랜만에 보신 건데 괜히 저 때문에…….”


“너 때문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태윤이 탓이 아니다. 고지식한 내 성격 탓이지.


“그런데 제일 앞에 빈 종이는 뭡니까? 낙서도 있던데요.”


내 눈치를 살피던 태윤이 조심스레 말했다. 그 말에 기획서를 확인하니 기획서들 앞에 웬 빈 종이가 있었다. 종이의 정 중앙에는 웃는 표정이 자그맣게 그려져 있었다.


“허, 이 자식이……. 이게 기획서였으면 어쨌으려고.”


아까 뭘 끄적이더니 이걸 그린 거였나. 이리도 순했던 아이가 어쩌다 그렇게 변했을까.


“이사회 회의가 한 시간 뒤였던가.”


“네 맞습니다.”


“잠시 어디 좀 다녀오마.”


나는 기획서들을 책상에 내려두고 휴대폰으로 태혁에게 전화를 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이태혁한테.”


태혁이 성격상 그렇게 집무실을 나가버리고 바로 다은을 보러 가진 않았을 것이다. 또 어딘가 구석빼기에서 죽치고 있겠지.


“다녀오십시오.”


“그래.”


집무실을 나설 때까지 지속되던 통화 연결음이 집무실의 문을 닫자 종지부를 찍었다.


“……왜.”


호기롭게 자기가 먼저 연락할 때까지 연락하지 말라고 화내면서 나가던 순간을 잊어버리기라도 한들 뾰로통한 목소리로 태혁이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어디냐.”


“알 거 없잖아.”


“임 비서 시켜서 위치 찾기 전에 말해라.”


깊은 한숨 소리와 함께 태혁이 말을 이었다.


“형 태윤이 좀 그만 괴롭혀. 미국 지사장 되면 내 비서로 데리고 가야겠어, 진짜.”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던 걸음이 ‘미국 지사장 되면’이라는 말에 잠시 우뚝 멈춰 세웠다. 아까 말을 함부로 거침없이 한 게 계속 걸렸던 모양인가.


“그냥 제안이었다. 강요도 아니었고, 네게 부담 주려고 한 말도 아니었어. 마침 자리가 비기도 하고 너 프로젝트 0호 끝나면 마땅히 일할 곳도 없잖아. 안 해도 괜찮아. 네가 하고 싶은 걸 해야지.”


아무것도 첨가되지 않은 순수한 걱정일 뿐이었다. 그냥 말로 하면 될 걸 그게 뭐가 어렵다고 나는 항상 빙빙 돌려 내 감정을 표했다. 감정 표현에 있어 서투른 것도, 이것이 안 좋은 습관이라는 것도 잘 아나 그렇게 쉽게 고칠 수 있는 거였으면 진작 고쳤지.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전부 해줄 수 있어. 미국 지사가 싫다면 여기 있는 백화점 지분을 전부 줄 수도 있고, 그것도 별로라면 그냥 뭐 필요할 때마다 말해. 뭐든 다 줄 테니까.”


솔직해지는 법을 배울 수는 없겠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나의 방식대로라도 표현해보려 한다.


“그러니까, 형한테 말하기만 해 줘라.”


잠시 짧은 정적이 이어졌다. 앞에 있는 돌을 차는 듯한 소리도 얼핏 들려오는 것 같았다.


“회사 정문 앞이야.”


시큰둥 전하는 태혁의 말이 어릴 때부터 삐져도 금방 다시 풀고 마음을 열었던 그의 성격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알겠다.”


“형.”


통화를 끊으려던 찰나에 태혁이 급히 목소리를 다시 꺼냈다.


“왜.”


오랜 침묵이 이어졌다. 더는 재촉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태혁의 말을 기다리자 태혁이 살며시 덧붙였다.


“……나…… 미국은 안 갈래…….”


낮게 잠긴 목소리가 힘겹게 나왔다.


“그냥……, 그냥 여기서 형 옆에 있을래…….”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영원이라는 정의도 그저 겨울의 역몽일 뿐이고, 여리고 또 여린 인간들의 꿈일 뿐이다. 세상 모든 것에 적용되지 않은 단어가 존재하는 이유는 사시사철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가면 때문이라.


그 가면이 부서지는 순간에는 감히 감당해 낼 엄두도 내지 못하는 두려움이 밀려오지.


“형이 빨리 갈게. 조금만 기다려.”


“응…….”


통화를 끊으며 나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다신 들을 수 없는 이의 목소리가 내 발목을 붙잡고, 악인의 목소리가 내 목을 조른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시초인 전설의 기운이 나를 휘감는다.


그 끝은,


‘다 제 탓인 것 같아요.’


한 아이의 말이었다.


작게 날숨을 내뱉고 잠시 멈추었던 길을 다시 걸어 나갔다. 언제까지고 전설에게 매달릴 수는 없으나 한낱 인간이 삶과 죽음의 굴레를, 운명과 세계를 홀로 견뎌낼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때의 일에 대해 죄책감과 책임을 가져야 할 사람은 윤선우가 아니라 나여야 한다.


그래, 적어도 ‘그때’의 일은.



*



“여보세요?”


집무실을 나가며 누나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다.


“아빠 집무실이라며? 내가 구해준 거지?”


누나는 나와 아버지의 사이를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내가 아버지를 많이 어려워하는 것과 아버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사부만큼이나 누나를 많이 의지했으니까.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아버지의 집무실에서 나오지 않는 내가 나오지 못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니거든.”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내 말에 누나는 믿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답했다.


“뭐야, 진짜?”


“어, 진짜. 곧 나오려고 했어. 뭐, 나올 타이밍을 못 잡은 건 맞긴 하지만. 갑자기 선우 형이 왔거든.”


“선우 오빠가?”


“응. 아, 누나. 혹시 고모에 대해서 아는 거 있어?”


“고모? 음…….”


누나가 잠시 고민을 하는 듯 짧은 정적이 이어졌다.


“딱히 없는 것 같은데. 아빠는 물론이고 엄마까지도 고모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으시니까.”


우두머리를 보며 고모가 생각났다는 삼촌의 말씀이 계속해서 거슬렸다. 그렇다 한들 아버지와 삼촌, 그리고 고모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인 건지 당장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일단 알았어. 지금 본부로 갈게.”


“빨리 와. 연정 언니가 너한테 물어볼 게 많대.”


“알겠어.”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아버지 집무실의 문을 한 번 쳐다보았다. 내가 직접 정하지 못할뿐더러 거스르지도 못하는 운명, 그리고…….


“……익숙한, 얼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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