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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막 익숙한 얼굴(5)

불의 나비 78화

by 매화연

고모의 하나뿐인 아들이자 나의 사촌 형인 윤선우 형이었다. 형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삼촌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들어와라.”


아버지의 말씀에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형이 집무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형은 삼촌과 눈이 마주치자 주춤했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삼촌이 형을 반기지 않으신다는 것은 확실했다.


“아……. 작은 외삼촌도 계셨군요. 오늘 복귀하신…….”


삼촌은 형의 말을 무시하신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셨다.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게 좋네.”


“이태혁.”


삼촌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을 끝내시기 무섭게 아버지가 목소리를 꺼내셨다. 평소보다 아주 낮고, 서늘하게. 아무래도 그 목소리에 긴장한 건 나뿐인 것 같았다. 자신의 이름이 아버지의 목소리에 담기자 잠시 움찔하던 삼촌은 이내 짙게 미간을 구기셨다.


“됐어. 다은이 보러 갈 거니까 내가 먼저 연락하기 전까지 연락할 생각도 하지 마.”


형을 지나치시고 열려 있던 문을 세게 닫으시며 삼촌이 집무실에서 나가셨다. 아버지는 짧게 한숨을 쉬시며 형에게 말씀하셨다.


“앉아라.”


뻘쭘하게 가만히 서 있던 형이 삼촌이 앉아 계셨던 자리로 가 앉으며 내게 안부를 건넸다.


“오랜만이네?”


나는 형을 유심히 보았다. 형은 고모에 대해서 잘 알겠지. 어쩌면 내가 모르는 무언갈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뭔가…….


“도헌아?”


나를 부르는 형의 목소리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어? 아, 그러게. 오랜만이네. 회사는 무슨 일로 왔어?”


“음 그냥, 조금…… 쓸쓸해서.”


형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근데 작은 외삼촌을 있으셨으면 안 올 걸 그랬어. 오랜만에 오셨는데 내가 괜히 방해한 것 같네.”


형의 말에 아버지가 시선은 여전히 서류에 두시며 말씀하셨다.


“신경 쓰지 마라. 네 잘못이 아니니까.”


“말씀은 정말 감사하지만, 엄마의 잘못이 제 잘못이니까요. 엄마가 돌아가신 상황에서 제가 엄마 대신 최대한 책임지고 싶어요.”


형의 목소리가 쓸쓸하게 변했다.


“그래도, 이렇게 가끔은 찾아와도 괜찮죠……?”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감사합니다.”


지금 형이 말하고 있는 고모의 잘못이 방금 전에 삼촌이 나에게 알려주려던 고모의 일인 듯한데.


형은 작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외삼촌. 운명이란 게, 그렇게 쉽게 거슬러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럼 만약에 엄마가 그런 짓을 벌이지 않으셨다면 지금껏 저에게 있었던 일도 없었을 것이고, 작은 외삼촌과의 관계도 좋았을까요?”


자세를 고쳐 앉으며 형이 나와 눈을 맞추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도헌아.”


“나?”


고개를 끄덕이는 형을 잠시 바라보다 생각을 한 번 해보았다.


운명은 이 비겁한 세상의 이치 중 하나이다. 나의 마음대로 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거스를 수도 없는 비루한 것.


헌데, 만약 내가 운명을 정하고 그에 따라 세상이 굴러간다 하여도 과연 지금과 바뀌는 것이 있을까? 이미 정해진 운명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정의되는 일들이 과연 바뀌기나 할까.


한 번 정해진 것은 바꿀 수 없다. 그게 내 의지가 들어가지 않은 운명이건, 내가 직접 정한 운명이건, 혹은 그것이 정녕 운명이 아닐지라도.


“잘 모르겠는데.”


“그러냐…… 어렵네.”


그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핸드폰을 꺼내 확인해 보니 선아 누나에게서 전화가 오고 있었다.


“전 이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도헌아.”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 집무실을 나가려던 그때에 선우 형의 목소리가 나의 걸음을 붙잡았다.


“많이 바쁜 모양이네. 그래도, 우리 엄청 오랜만에 만난 건데.”


핸드폰은 멈추지 않고 쉴 데 없이 급히 울리고 있었다.


“미안, 본부 일이 조금 바빠서.”


“그 실군단인가 뭔가 하는 녀석들 때문이지? 특경부가 고생이 많아.”


심장이 아주 느리고 천천히, 그리고 크게 뜀박질하기 시작했다.


“아니야. 뭐…… 실질적으로 우리가 하는 일은 많이 없어서.”


형의 눈, 그 속에 담겨 있는 반짝임을 빤히 주시하였다.


“……그래?”


형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나보다야 너희들이 낫지. 그러고 보니 작은 외삼촌이 왔으면 연정이도 왔겠구나. 오늘 익숙한 얼굴들이 많이 왔네.”


익숙하게 미소를 지으며 형이 이어 말했다.


“아, 애들 기다리겠다, 얼른 가 봐.”


그리고 또다시, 형이 덧붙였다.


“그럼 다음에 또 보자.”



*



“다 제 탓인 것 같아요.”


집무실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애써 웃음을 유지하고 있는 선우에게 시선을 옮겼다. 선우는 죄책감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집에 저 혼자밖에 없으니까 작은 소음조차 들리지 않는 시간들이 대다수거든요. 그렇게 조용한 집에 혼자 있다 보면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들이 계속해서 생각나요. 저도 쓸데없는 생각은 하고 싶지 않은데 그게 제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더라고요.”


몇 번 웃어 보임과 동시에 선우가 한껏 쓸쓸함을 실었다.


“어릴 때 일이라 기억은 선명하지 않지만 감정은 쉽게 잊히지 않네요. 짧은 시간에 이런저런 일이 많았잖아요? 뭐, 아빠가 저와 엄마를 버린 일부터 시작해서 특히 엄마가 세상을…….”


선우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그만 고개를 푹 숙였다.


“……외삼촌은 저를 두고 떠나지 않으실 거죠? 절 버리지 않으실 거죠? 염치없는 말이긴 하지만, 그래도 외삼촌한테는 미움받고 싶지 않아요…….”


“그럴 일은 없으니 괜한 걱정 하지 말거라. 그리고, 그때 일은 네 탓이 아니야. 네가 책임 안 져도 돼.”


고개를 다시 들며 선우가 어린아이인 마냥 무해한 웃음을 지었다. 선우는 책상으로 시선을 옮겨 연필꽂이에 꽂혀 있는 볼펜을 하나 집었다.


“역시 외삼촌은 다정하시군요.”


왼손으로 볼펜을 잡고 앞에 있는 종이에 무언갈 끄적이며 선우가 말했다.


“나한테 다정하다고 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다.”


내 말에 입꼬리를 올린 채 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그래도 바쁘실 텐데 제 어리광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또 봬요.”


선우가 집무실을 나가자 곧바로 태윤이 안으로 들어왔다.


“어라, 태혁 님과 도헌 도련님이랑 대화 중이시던 거 아니셨습니까?”


나밖에 남지 않은 집무실을 살피며 태윤이 말했다.


“둘 다 일이 있어서 진작에 나갔다.”


“아, 그렇군요. 그럼 누구랑 그렇게 오래 대화를 하신 거예요?”


“윤선우가 찾아와서.”


그 아이의 이름이 언급되자 태윤은 몸을 흠칫했다.


“……태혁 님이 계셨을 때요?”


“그래.”


잠시 내 눈치를 살피며 무언갈 생각하더니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이야기가 길어지시던데,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아니.”


태윤은 나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하아, 도련님은 대표님을 닮으신 게 확실합니다. 두 분 다 무슨 일 있어도 절대 말씀 안 하시지 않습니까?”

“아무 일도 없다 하지 않았느냐.”


“네, 어련하시겠어요~”


내 말을 태윤은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임태윤.”


“예, 예?”


평소와 달리 갑작스레 자신의 이름이 부르자 태윤이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이태혁이 너한테 연다은 별 방문 언제였냐고 묻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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