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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막 불길에 타버린 사랑(5)

불의 나비 84화

by 매화연

“……여보……?”


나의 아내였다.


아니, 본래 그녀의 색을 완벽히 삼킨 역한 그 녀석의 하늘색 빛을 품고 있는 아내의 형상이었다.


기억과는 달리 아무런 표정도, 감정도 담지 않은 아내의 형상은 그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하늘색의 실로 이루어진 검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나에게 달려들었다.


휘릭, 한번.


휘리릭, 또 한번.


휘릭, 휙, 이번엔 연속해서 두 번.


휙, 다시 짧게 한번.


단 다섯 번이었다. 다섯 번의 휘둘림 중 나에게 닿은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조금 스치지도 않았다.


“……당신, 속성도 없었잖아.”


또다시 휘릭.


극악의 빛을 뿜어내며 휘익.


군데군데 몸에 감겨 있는 실을 흩날리며 휙.


“운동신경도 없어서 학창 시절 때 체육을 가장 싫어했고, 운동 자체도 안 좋아했잖아.”


잠시 거칠게 숨을 내뱉으며 쉬다 다시 휘둘러지는 검. 조금만 몸을 옆으로 틀어도 쉽게 피할 수 있는 공격들. 계속해서 똑같이 반복되는 단일한 움직임.


“조용한 교실에 앉아 책을 읽는 걸 좋아했고, 점심시간만 되면 어떨 땐 밥도 안 먹고 도서관에 갔잖아.”


검을 다루는 방법을 모르는 건 물론, 공격에 대한 기본기조차 없었다. 꾸밈없이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공격이라 칭할 수도 없는 무의미한 퍼덕임에 지나쳤다.


어떻게 자세를 잡는지, 어떻게 검을 쥐고 휘두르는지, 어느 타이밍에 어떻게 상대에게 달려들어야 하는지, 어떻게 전투 실력을 모르는 상대를 파악해야 하는지, 어떨 때 숨을 골라야 하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그냥 팔을 움직이고 있었다.


“조금만 운동을 해도 어김없이 다음날 근육통에 시달렸고, 조금만 무리해도 아플 정도로 몸이 약했잖아.”


감기는 만성이었고 특정 질병이 유행하는 시기가 되면 절대 순탄히 지나지 못해 항상 고생을 했다.


그렇게 면역력이 약하던 당신이 가장 좋아했던 순간이 달이 휘영청 뜬 이른 새벽에 나와 산책을 하던 시간이라는 걸 알고 난 뒤에 사무쳤던 감정을 이루 형용할 수 없었다.


내 뒤를 노리며 검을 들고 뛰어드는 아내의 행동을 살짝 몸을 돌려 쉽게 피하자 순간 중심을 잃은 아내가 휘청거렸다.


재빨리 발을 옮겨 아내의 등을 팔로 받쳤다. 나와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반사적으로 검을 손에서 놓은 아내가 이내 황급히 검을 다시 잡으며 내 뒤로 달아났다.


“……나랑 결혼하고 나서는 쌍둥이 체력에 못 이겨 애들 놀아줄 때도 힘들어했잖아.”


퇴근하고 돌아오면 쌍둥이와 놀아주느라 녹초가 되어있는 아내가 나를 맞이했다. 피곤해하고 힘들어하면서도 아내는 행복하다며 웃곤 했다.


속성도 없던 당신의 눈에는 어쩌면 내가 괴물로 보였을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런 나를 당신은 이해하고 사랑해 주었다. 나에게 이준과 이후와 이현이라는 축복들을 선사해 주었다.


“그리고, 지금도 충분히 힘들잖아.”


거친 숨을 힘겹게 내쉬며 아내가 잠시 공격을 멈추었다. 지금까지 아내가 검을 휘두른 횟수는 총 열한 번. 그중에서 내 몸에 자그마한 생채기 하나도 남긴 휘둘림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여보가…….”


다시금 나에게 달려들며 열두 번째 휘둘림을 재개할 때였다. 나는 피하지 않고 멈추어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고개를 푹 숙였다.


“나를 어떻게 이겨.”


가쁘게 겨우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깐의 정적이 흘렀고 곧이어 나를 찔렸어야 될 칼날이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지는 모습이 내 시야 안에 들어왔다.


“왜……, 왜 안 찔러. 나 지금 가만히 서 있잖아. 안 피했잖아…….”


일부러 검을 피하지 않을 때마다, 오히려 검을 휘둘러오는 아내에게 다가갈 때마다, 왜 피하지 않냐며 꾸짖는 듯 뾰로통한 표정이 어찌나 내 가슴 깊은 곳을 억지로 파고드는지, 그 아픔이 얼마나 큰지, 감히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존재가 진짜 아내가 아니라 그저 우두머리의 농락이 가득 담긴 형상일 뿐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인지하고 있다. 이런 새들한 능력은 나에게 위협조차 되지 않는다. 당장이라도 손쉽게 빨리 처리할 수 있다.


그런데, 대체 나는 왜 해치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울고 있는 걸까.


이제는 지긋지긋하기까지 한 그 녀석의 하늘색의 빛이 흐려지며 일렁거렸다. 빛을 흐리게 만든 주범이 본거지를 떠나 밑으로 추락하자 빛이 금방 원상태로 돌아왔다.


“……미안해, 여보. 언제나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약속도, 당신도 지키지 못했어. 미안해…….”


온전히 슬픔에 잠겨 있었던 시간은 없었다. 울었던 시간은 아이들이 곤히 잠들고 세상이 고요히 내려앉은 찰나의 새벽뿐이었다.


형상에 지나지 않을지언정 여보가 내 두 눈앞에 나타나자 그동안 참고 쌓였던 슬픔이 울컥 솟구쳤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뜨거워지는 눈시울과 나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버린 눈물을 어찌하지도 못한 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적나라하게 느낄 뿐이었다.


“여보.”


마치 물에 잠긴 듯 먹먹하고 답답하던 날숨이 나를 향한 한 단어에 의하여 일시 멈추었다.


“고마워.”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주는 온기 어린 손길이 볼을 보드랍게 감쌌다.


“우리 최 소장님 덕분에 애들 너무 예쁘게 잘 컸더라. 그동안 고생 많았어.”


고개를 들자 환히 웃고 있는 아내가 보였다. 하늘색의 빛을 떨쳐 내가며 잃었던 색을 되찾아가는 나의 아내가 나를 보며 변함없는 따스한 웃음을 띤 채 내게 고운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었다.


“앞으로도 이준이랑 이후, 이현이 부탁할게. 그렇다고 자기 자신을 너무 소홀히 대하지 말고. 알았지?”


가지 말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붙잡고 싶은 마음이 온몸을 지배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았고, 그렇기에 나는 점차 모습이 옅어져 가는 아내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랑해.”


한시도 잃지 않았던 미소는 바람에 몸을 맡긴 사진에 각인되었다. 손을 뻗자 그 위로 사진이 안착하였다. 아내가 남기고 간 사진 속에는 나와 아내, 그리고 어린 이준과 쌍둥이의 웃는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방금 그게 아내의 현상이었는지, 진짜 아내였는지. 이 사진은 어떻게 구했으며, 어떻게 아내가 사라짐과 동시에 이 사진이 나타났는지. 이것이 우두머리의 짓인지 아닌지.


여러 궁금증이 머릿속을 휘저었지만 지금은 중요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과거는 그립고, 현재는 두려우며, 미래는 막연하다.


그러나,


찰나의 과거는 기록할 수 있고, 이어지는 현재는 걸어갈 수 있으며, 나아갈 미래는 바꿀 수 있다.


아직 내 볼에는 온기가 남아 있었고, 귓가에는 다정한 목소리가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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