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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막 불길에 타버린 사랑(6)

불의 나비 85화

by 매화연

*


“……나랑 결혼하고 나서는 쌍둥이 체력에 못 이겨 애들 놀아줄 때도 힘들어했잖아.”


흙이 고스란히 남겨둔 최 소장님의 발자국을 따라 산의 정상으로 올라가자 최 소장님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대화의 상대가 분명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불현듯 엄습한 불안감에 엄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얼마 안 가 최 소장님의 뒷모습이 보였다. 거친 숨을 천천히 내뱉으며 나는 우뚝 멈춰 섰다.


미세하게 어깨를 떨고 있는 최 소장님의 뒷모습. 그리고, 최 소장님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는 최 소장님의 아내분, 아니 그녀의 형상.


오로지 하늘색의 빛으로만 이루어진 모습이 빼도 박도 못하게 우두머리의 짓임을 각인시켜주고 있었다. 허나, 틀림없이 그자의 놀음이라는 걸 안다 한들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겠는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두머리의 짓이라며 최 소장님에게 알려주지 않아도 충분히 뼈저리게 느끼고 계실 테고, 상대가 최 소장님이기에 내가 나설 필요도 나설 자격도 없다.


그저 내가 왔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듣고 싶지 않아도 들려오는 최 소장님의 사무친 목소리를 의식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도 충분히 힘들잖아.”


검을 휘두르는 소리가 잠시 멈추었고 힘겹게 내쉬는 거친 숨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뭔가 이상하다. 지금 아내분의 형상의 모든 움직임은 우두머리의 조종이었다. 아무리 속성도 없으셨던 아내분이 생전 검을 한 번 집어보시지도 않으셨다 하여도 정말 처음 검을 휘두르는 것인 마냥 어설픈 동작과 자세는 말이 안 된단 말이다.


특히 계속해서 보이는 멈칫거림. 어떻게 검을 휘두르는지 몰라서, 어느 타이밍에 달려들어야 하는지 몰라서 나오는 게 아니었다. 멈출 수 없는 의무적인 공격에 대한 반항이다.


현상일 뿐이어야 되는 존재가 마치 정말 혼이라도 되는 듯 행동한다라.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거지?


“그런 여보가…….”


한 번 더 바람을 겨우겨우 가르는 소리가 전해졌다.


“나를 어떻게 이겨.”


잠깐의 정적이 이어진다. 무슨 상황인지 확인하려 고개를 옆으로 돌리려던 걸 다시금 들리는 최 소장님의 목소리에 행동을 기각하였다.


“왜…… 안 찔러. 나 지금 가만히 서 있잖아. 안 피했잖아…….”


잠겨 가는 목소리에 눈물 한 방울이 섞여 들어갔다.


“……미안해, 여보. 언제나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약속도, 당신도 지키지 못했어. 미안해…….”


최 소장님은 절대 무너지지 않으셨다. 어쩌면 무너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영원을 기약한 연모가 떠나가도 아직 그의 곁에는 축복이 남아 있었기에 결코 무너질 수 없으셨을 테지.


감정은 아주 연약하고 여린 존재들이다. 함부로 다루어서도 안 되고, 그를 받아들일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며 그 시간을 수용하지 않으면 어느샌가 고장 나버리기도, 한 번에 감당하지 못할 만큼 많은 양이 폭발해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특성에 예외가 되는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슬픔도 마찬가지다. 슬픔은 온전히 잠겨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 다른 것들보다 유독 가녀린 슬픔은 고장 나기 훨씬 쉽다.


사부가…… 눈물샘은 쉽게 망가진다 하셨던가.


‘눈물샘은 망가지기 쉽다. 다시 회복하기까지도 꽤나 많은 시간을 지내어야 하지. 그러나 슬픔과 눈물은 반드시 표출되어야 한다. 절대 참아서는 안 돼. 슬픔이 있기에 행복이 다가오고, 눈물이 있기에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게 아니겠느냐.’


……네, 사부. 잘 압니다. 사부가 지겹도록 저에게 해주신 말씀이잖아요.


‘그러니, 도헌아. 속으로 삼키며 혼자 앓지 말고 꼭 사부에게 말해 다오. 넌 혼자가 아니니까.’


혼자.


이 단어의 담긴 쓸쓸함을 가히 측정할 수 있을까.


그 쓸쓸함을 온전히 부정할 수 있는 존재가 내 곁에 없다는 서글픔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여보.”


문득 스쳐 지나가던 사부의 목소리와 그분의 모습이 이제는 낯설 정도로 과거에서 온 목소리가 들리자 이내 기억이 옅어지고 말았다.


“고마워.”


이 목소리는…… 최 소장님의 아내분?


의문이 들었으나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푹 숙였다.


“우리 최 소장님 덕분에 애들 너무 예쁘게 잘 컸더라. 그동안 고생 많았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최 소장님이 절대 보이고 싶지 않아 하셨던 모습을 지금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고이 담고 있다는 것을.


순간 벨트 뒤에 있던 무전기가 긴급을 알렸다.


“이도헌, 이도헌! 내 목소리 들려?”


산 정상이라 전파가 잘 통하지 않는지 지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다급한 인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그, 본부에 갑자기 이준이 형이랑 쌍둥이 어머니 형상이…… 아니, 이걸 뭐라 해야 되지?”


인혁의 말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최 소장님 앞에 아내분의 형상이 서 있었다. 그것도 형상이라는 단어를 철저히 부정하듯 온전히 자신의 색을 품은 모습으로 최 소장님의 볼을 어루만지고 계셨다.


“아무튼 혜영 이모가 갑자기 나타나셨어. 또 그 자식들 짓인 거 같은데, 어떻게 할까? 속성이라도 사용해야 하냐?”


“괜찮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마. 그냥 조금 멀리 물러나 있어. 혹시 모르니까 최대한 가까이 가지 말고. 이준이 형이랑 쌍둥이는 괜찮지?”


물음을 건네었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고 무전기 사이로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박인혁?”


“야 이도헌.”


나를 부르는 인혁의 목소리가 어째 아까보다 나직해져 있었다.


“너, 무슨 일 있냐?”


그 말 한마디에 순간 몸이 흠칫 떨렸다.


“지금 최 소장님 예전 집 뒷동산인데 여기도 혜영 이모 현상이 나타나서.”


“아니, 그러니까 너 인마, 너한테 무슨 일 있냐고.”


은근슬쩍 넘어가려 꺼냈던 말이 인혁에게 전혀 먹히지 않았다.


“……없어.”


“아닌데. 목소리가 평소랑 다른데?”


일부러 억누르고 신경 써서 말했다 생각했는데도 어떻게 넌, 그걸 단번에 다 알아채는 건지.


“난 됐으니까 본부 상황 좀 네가 계속 살펴봐 줘. 그리고 나 괜히 기다리지 말고 다 먼저 퇴근하라 그래.”


“어어? 무전 끄지 마라. 나 아직 말 안 끝났다. 끄지 말라 했-!”


인혁의 말이 끝나기 전에 나는 무전기를 끄고 다시 집어넣었다.


세상의 고요가 자각되자 누르고 또 누르려해도 터져 나와버리는 울음을 작은 훌쩍임과 함께 흘려보내는 최 소장님이 보였다.


최 소장님의 울음이 조금은 진정될 무렵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최 소장님이 나의 걸음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일부러 나뭇잎을 살며시 지르밟으며.


바스락, 초대받지 않은 소음이 섞인 발소리에 최 소장님이 목을 가다듬으셨다.


“최 소장님.”


“아, 도헌이 왔느냐. 어디 다친 데는 없고?”


빨개진 눈시울은 차마 숨기시지 못한 채 최 소장님이 애써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셨다.


“네. 그나저나 지금 본부로 가보셔야 될 것 같습니다.”


“왜? 본부에 무슨 일이라도 있나?”


“본부에 아내분의 형상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모든 부가적인 설명을 제외한 단소한 말 한마디에 애써 유지되던 최 소장님의 미소가 끝내 모습을 감추었다.


“저는 상황 마무리하고 뒤따라 가겠습니다. 먼저 가세요.”


“알겠다. 시간 늦었으니 조심하고.”


굳은 표정에 인상을 더하신 채 최 소장님이 본부로 향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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