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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막 불길에 타버린 사랑(8)

불의 나비 87화

by 매화연

어쩌면 이쪽 상황이 더 익숙해야 되는 게 분명한데도 미련 남은 손을 점차 하늘색의 빛으로 바뀌시는 어머니를 향해 뻗은 것도, 누군가를 향해야 할지 모를 기분이 썩 좋지 않은 찝찝하고 불쾌한 원망에 사로잡히는 것도, 사무친 그리움에 신체의 모든 기능이 일시 고장 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순간, 엘리베이터가 전하는 짧은 음이 연주되며 문이 열렸다. 도헌이가 돌아온 줄로만 알고 고개를 돌렸으나 본부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아버지셨다.


“아빠……!”


아버지를 보자 참고 있던 두려움과 서러움이 한꺼번에 밀려온 모양일까, 아니면 그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북받치는 달궈진 감정에 아버지의 품에 안기지 않고서야 버틸 수 없던 모양이었을까. 아버지에게 와락 안긴 이현이 울음을 터트렸다.


“우리 딸, 많이 무서웠어?”


“아빠…… 왜 이제 왔어…….”


거친 숨을 고르지도 못하신 아버지는 등을 토닥이시며 품에 안긴 이현을 달래셨다.


“다친 곳은 없지?”


애써 삼키지 못한 감정을 눈물에 담았으나 그마저도 꾹 참은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이후를 바라보시던 아버지가 손을 뻗으셔서 이후의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그러자 끝내 이후의 눈가에 아슬아슬하게 고인 눈물이 주저 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직 아버지의 눈시울에 남아 있는 붉은색은 없어질 온전한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빠가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미안하구나.”


쌍둥이를 달래시던 아버지의 시선이 옮겨졌다. 아버지와 눈이 마주치자 어머니가 밤하늘로 떠나신 직후 이른 새벽마다 몰래 눈물을 훔치시는 아버지를 보던 유년의 밤이 한 번 더 나를 찾아왔다.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울렁거림과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달갑지 않은 서글픔과 절대 무너진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는 강박이 거칠게 뒤섞인 과거를 당장이라도 뱉어내고 싶었다. 도저히, 그 지독한 쓰라림을 이제는 삼킬 수가 없었다.


아른거리는 그리움의 형상과 아픔의 형상에 두 눈을 감아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죄책감의 목소리와 비열함의 목소리에 두 귀를 막아도.


어떻게든 악착같이 버티며 앞을 향해 떨리는 두 다리를 움직여봐도.


억누르고 또 억눌러도 지치지도 않고 꿋꿋이 기어 올라오는 치열한 지난날들에 나의 미약한 발버둥이 모조리 무마되었다. 떨쳐내지 못한 그날의 참혹함과 비참함이 나를 철저히 짓눌렀다.


찰나의 재회로 인해 곧바로 다시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무너진 나를 아버지는 지금 어떻게 보고 계실까. 쌍둥이는 이런 모습을 보이는 지금의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 누구에게도 실망을 떠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에게도, 쌍둥이에게도, 특경부 대원들과 속성 대표님들에게도.


언제나 의지할 수 있는 단단한 반석 같은 존재가 되고 싶었다.


감정 쓰레기통으로 여겨져도 좋으니 이제는 아무도 나를……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나를 자책하는 일도, 죄책감이라는 심해에서 숨을 쉬지 못하고 발버둥 치며 괴로워하는 것도, 별에만 의지한 채 우는 일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머무는 게 너무 힘들었다.


“아빠가 미안하다.”


그런 거친 소용돌이 안으로 아버지가 걸어 들어오셨다. 엄청난 위력을 내뿜으시는 아버지의 모습에 겁을 먹은 소용돌이가 잽싸게 달아나버렸다.


그 안에 주저앉아 있던 나를 찾아오신 아버지가 따듯하게 날 안아주셨다. 내게 실망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이제는 그 책임과 죄책감과 강박의 짐을 내려놔도 된다고 말씀해 주시는 듯 더욱 꽉 안으셨다.


“미안해. 아빠가 더 잘했어야 했는데…… 우리 아들에게 짐을 맡겨서 미안해. 너무 늦게 알아줘서 미안해.”


아버지의 떨리는 손이 내 머리와 어깨를 감쌌고, 울음이 섞여가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심장을 관통했다.


“우리 아들, 여태 얼마나 힘들었을까. 어린 나이부터 혼자 버티느라 얼마나 고단했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힘들지 않아야 했다. 고단을 덮어버려야 했고, 아픔을 외면해야 했다. 아무도 절대 그간의 산창을 알아서는 아니 되었다. 그건 오로지 나의 짐이었다. 어떻게든 끝까지 안고 가야 할 책임이었다. 그것을 누군가 알아주는 순간이 온다면 완벽하게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잖아. 적어도 나는 그러면 안 되는 거니까. 무너지면 안 되니까.


그런데…….


“너무, 너무 늦었어, 아빠가. 진작에 알아주고, 진작에 말해줘야 됐는데……. 이제는 혼자 짊어지지 않아도 돼. 힘들다고 말해도 되고, 어리광도 부려도 돼. 울어도 돼. 그래도 괜찮아.”


먹먹히 잠겨 들어가던 목소리를 다듬고 아무렇지 않다고, 괜찮다고 거짓을 꺼내기엔 지난 몇십 년간의 서러움이 내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늦었잖아요.”


오랜만에 터져 나온 온전한 진심 하나가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무수한 눈물을 형성하였다.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닳고 닳아 없어질 줄로만 알았던 설움이 한꺼번에 흘러나온다. 그 설움은 얼마 못 가 곧 형태가 일그러지며 알 수 없는 무언가로 변하였다.


또다시 모습을 드러낸 자책인 건가, 한 번도 내 곁을 떠난 적 없는 죄책인 건가, 실상 자책과 죄책을 불러일으킨 그리움인 건가.


“미안하구나.”


연신 사과를 전하시는 아버지를 끌어안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죄송해요, 아버지……. 그냥 전부…… 죄송해요. 다 제 잘못이에요…….”


“아니다. 그런 말 하지 마. 그 어떤 것도 네 잘못이 아니야.”


변함없이 언제나 따듯한 아버지의 품과 다정한 목소리가 텅 빈 마음을 가득 채웠다. 내 모든 슬픔이 이제는 떠나가기를, 여전히 세상 속에 머물러야 한다면 차라리 자신에게 옮겨 나에게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 손길과 맞닿은 가슴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버지…….”


“괜찮다. 괜찮아.”


별과 달의 기억은 밤이 깊어지면 의연히 세상에 내려앉는다. 기억들은 풀잎의 이슬에, 바다의 윤슬에, 반딧불의 불빛에 차차 녹아들며 잠에 든 자들에게는 평온한 꿈을, 잠을 이루지 못한 자들에게는 연유를 담을 기회를 선사한다.


그 기억 속에 담겨 있는 건, 그리고 앞으로 담길 건 기억이 이슬과 윤슬과 불빛으로 변할 무렵 기회를 선사받은 자들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속삭임이다.


별과 달의 기억이 다시금 하늘로 올라갈 때 모든 자의 눈물도 함께 올라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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