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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막 불길에 타버린 사랑(9)

불의 나비 88화

by 매화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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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를 쭉 둘러보아도 눈에 들어오는 건 어두컴컴한 밤하늘 아래 아득히 내려앉은 산의 전경뿐이었다. 간혹 시끄럽게 울어대는 새의 지저귐이 들려올 뿐 어떤 생명체도 먼저 나서서 나타나지 않았다. 의식하고 싶지 않아도 계속해서 느껴지는 먼 곳에서의 실군단의 기척과 바람에 실린 한기가 중턱부터 맨 아래까지 곳곳에 날 기다리며 기습을 준비하는 숨겨진 실군단의 존재를 낱낱이 알려주고 있었다.


정상에서 몇 걸음 내려가자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실군단이 나를 덮쳤다. 조금 더 내려가야지 나타날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빠르군.


불의 나비가 고도의 한기를 뚫고 도달한 실군단을 관통하였다.


실군단은 속성 보유자가 처리하기에 몹시도 쉬운 존재이다. 거기다 뛰어난 전투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오히려 적이 아닌 그저 연습 상대로 사용해도 될 정도이며 누군가에게는 시시하기 그지없는 장난감 정도가 될 만큼 만만한 대상이다.


그런 존재를 왜 특수 속성 경호 본부라는 표리부동의 겉보기 기관을 만들어 주시하게 하는지, 협회에 머무는 시민들은 모두 속성 보유자임에도 그들에게 이 존재를 왜 철저히 숨기는지, 그들을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을 테지.


개개인의 능력치는 그리 뛰어나지 않으나 뭉치면 뭉칠수록 강함이 배가 되는 게 실군단이다. 그리고 결코 그들은 혼자만 나타나지 않는다.


사방에서 실과 화살과 검이 날아온다. 하나를 처리하면 둘이 나타나고, 둘을 처치하면 넷이 나타난다. 불 속성에 타버린 실군단의 수가 늘어나면 얼음 속성으로 대항하는 실군단의 수가 하나를 더해 더욱 증가한다.


직접적으로 실이 피부에 닿지 않아도 스쳐 가는 바람에 담긴 날카로운 한기가 살갗을 찢는다. 눈에 보이는 확연한 상처는 없지만, 그렇다고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내상인가.


나는 잠시 자리에 우뚝 서서 불과 몇 분 전보다 스무 곱절은 늘어나 끝도 없이 펼쳐진 실군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내가 가만히 있자 어쩐 이유인지 실군단도 주춤거리며 제 자리에 멈춰 섰다.


……잠시만, 주춤? 주도권을 빼앗긴 몸뚱어리를 움직여 보려는 듯 실군단이 흠칫 댔다. 스스로 공격을 멈춘 게 아니란 말이야? 그렇다는 건…….


우두머리가 아닌 다른 누군가, 실군단의 모든 행동을 일제 통제하고 있다. 대체 누가? 아니, 애초에 우두머리의 손아귀에서 실군단이 벗어날 수 있었던가? 그들의 창조주 이외 타인의 명을 받들 수 있다면 지금껏 실군단을 조종해 온 자가 우두머리뿐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티끌만 한 작은 증거 하나도 간과해선 안 된다. 맞을 확률이 일 퍼센트의 계산이라 한들 마냥 무시할 수 없다.


단 하나도, 놓쳐선 안 돼.


사부를 앗아간 실군단에 관해선 뭐든.


예상치 못한 상황 속에 놓여 머리가 복잡해 미치겠는데 와중에 실군단을 향한 구속은 찰나였을 뿐이었다. 금세 자유로워진 실군단이 다시금 공격을 나에게 퍼붓기 시작했다.


“거슬려.”


혼잣말하듯 낮게 내뱉으며 나는 아무런 조절도, 제어도 들어가지 않은 불의 나비를 하나 소환하였다. 화상을 입은 듯한 아린 통증에 손이 움찔거렸다.


달 속성의 영향을 받고 세상 밖으로 나온 불의 나비가 여느 때보다 조금 더 느긋하게 날갯짓을 하며 실군단에게로 날아갔다. 실군단들은 유독 찬란히 빛나는 불의 나비의 빛에 현혹되어 일동 몸이 굳어버렸다.


가장 선두에 서 있던 실군단 속으로 불의 나비가 들어가자 현현한 백색의 빛이 실군단을 터트렸고 연이어 이곳에 있던 모든 실군단의 몸이 터져버렸다. 단 하나의 큰 폭발음처럼 들릴 만큼 거의 동시에 모든 실군단이 사라졌다.


손에 머물던 통증이 오른팔 전체에 퍼졌다. 화끈거림이 곧이어 심장에까지 도달하였다.


아릴 정도로 빠르게 요동치는 심장과 진정되지 않은 거친 호흡이 목을 조여왔다. 애써 천천히 숨을 내뱉으며 심장을 부여잡았다.


방금 전 불의 나비에는 매우 약한 달 속성이 함유되어 있었다. 함유라는 단어가 과언일 정도로, 분석을 한다면 달 속성이 나올지도 미지수일 정도였다. 그저 직접 꺼낼 수 없는 달 속성의 영향을 조금 받은 것뿐인데 온전한 달 속성이 아님에도 이것조차 허락해주지 못하겠다, 이건가.


“……하아.”


서늘한 밤공기가 폐로 들어오며 호흡이 점차 안정되었다. 심장의 통증도 나아들 기미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이만하면 충분했다. 다시 나아가도 된다. 아니, 가야 한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밤이 고스란히 내려앉아 녹아든 산속, 내가 의지할 빛은 휘영청 떠 있는 미약한 달빛뿐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을 밟자 고요한 산에 바스락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우연히 보게 되었다. 최 소장님이 들고 계시던 사진을.


문득 눈에 들어오게 된 사진 속에는 최 소장님과 아내분, 그리고 어린 이준 형과 쌍둥이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끝이 명확하다면 살아가고 있는 현재가 아무리 힘들고 고되다고 한들 어떻게든 종착까지 버틸 수 있다. 이 어둠도 결국 끝난다는 걸 아니까, 언젠가 빛이 환대해 줄 거라는 걸 느끼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끝의 유무조차 알지 못한다면. 어둠의 종착이 어딘지, 빛이 있긴 한지, 잔혹한 세계가 부서지긴 하는지, 그 무엇도 모른다면.


……사부와 찍은 사진을 지갑에 넣어놨던가.


나는 잠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현 상황에서 내가 사부와의 시간을 추억해 봤자 변하는 건 없었다. 도움이 되긴커녕 방해만 될 뿐이다.


의연히 피어오른 사부를 다시금 억지로 밀어 넣었다.


이른 오후에 머물렀던 산하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해서 귓가에 맴돌던 새들의 지저귐도, 더 이상의 실군단도 존재하지 않았다.


산에서 벗어나기까지 단 한 걸음을 남겨둘 무렵, 검을 든 실군단이 서른 정도 앞에 서 있었다. 아무 생각도 거치지 않고 나는 반사적으로 불의 나비를 소환하였다.


불의 나비가 실군단을 재빠르게 쫓았다. 하나둘 사라지는 실군단을 멀리서 지켜만 보고 있던 순간, 갑작스레 중심을 잃은 몸이 휘청거렸다. 금방 다시 중심을 잡음과 동시에 달갑지 않은 두통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한 손으로 머리를 잡고 인상을 썼다.


삐이이, 시끄러운 이명과 어지럼증까지 동반되어 지금 내가 두 발로 제대로 서 있는 것인지조차 인지되지 않았다.


눈길을 현혹할 정도로 눈부시던 노을을 잃고 어둠이 깃든 하늘에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는 비가 체온을 확연히 떨어트리며 나를 적셔갔다. 휘청거리는 몸을 겨우 붙잡고 제자리에 서서 천천히 숨을 내쉰 채 겨우 고개를 들었다.


그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며 검이 내 복부를 향해 매섭게 날아왔다. 검을 인지하며 몸을 옆으로 이끌었을 땐 이미 검이 내 왼쪽 옆구리를 스치고 있는 중이었다.


뜨겁다. 깊게 상처가 난 옆구리에서 하늘색으로 선명히 빛나는 빛과 끈적한 피가 흘러나온다.


오른손으로 옆구리를 감싸며 왼손으로 불의 나비를 소환하려 했으나 그칠 생각 없이 무수히 쏟아지는 비에 불이 타오르기도 전에 계속하여 커지기를 반복했다.


“빌어먹을…….”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옮기며 실군단과 거리를 좁혀 나갔다. 실군단의 바로 앞에 서기도 전에 그들이 먼저 나에게로 다가왔다. 나는 검을 내세운 채 내게 달려드는 실군단의 몸속에 직접 불 속성을 넣었다.


실군단의 몸에 손을 닿자 손에 머물던 꺼지지 않은 불 속성이 그들의 몸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그 짓을 스무 번 정도 반복했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주위에 남은 실군단은 없었고 팔 구석구석에는 작은 상처들이 새겨져 있었다. 비에 젖어서 그런지 손에 남아 있던 한기가 금세 온몸으로 흘러갔다.


인기척이 느껴진다. 실군단이 아닌 사람의 인기척이. 처음 이 산을 왔을 때도, 지금도, 변함없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아주 약했고 익숙했다.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으나 밤에 침식된 산속에서 시야에 들어오는 거라곤 그저 무겁게 내려앉은 밤바람과 그에 맞춰 흔들리는 우거진 나무들뿐이었다.


지금 몸 상태로는 수색이 불가하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억지로 몸을 끌고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간다 한들 그때는 이미 기척의 장본인이 자취를 감춘 뒤일 것이다.


꺼림칙하게 걸려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찝찝함을 해소하지 못하고 비에 다 젖은 몸을 비틀거리며 회사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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