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나비 90화
묻고 싶다. 정말 내 잘못이 아닌지, 정말 괜찮은지.
과거에서 온 소리조차 해당되지 못하는 나의 그리움이 멋대로 만들어낸 환각 증세. 고칠 방법도 없다. 이런 증상을 겪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도 없고. 단순한 트라우마랑은 결이 다르다. 이 환각을 처절하게 붙잡고 있는 건 아직도 놓지 못한 미련이기에 미련을 버리지 않는 이상 환각도 떠나가지 않을 것이다. 놓는 방법도 모르긴 하나 솔직히 놓고 싶지도 않았다. 환각 속의 목소리가 귓가에 살며시 앉을 때마다 요동치는 그리움에 숨이 멎을 것 같아도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사부의 목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어떤 방법이든 상관없었다.
“……하하하.”
처음은 그저 웃음소리였다.
“어머니가…….”
겨우 한 어절을 뗀 형이 한참 뒤에야 문장을 완성시켰다.
“……보고 싶어요……. 너무, 그립습니다…….”
울음이 섞여 들어가는 목소리는 곧이어 아무런 단어를 담지 않고 조금씩, 작게나마 소리를 내보내었다.
애절한 훌쩍임에 동요하듯 문고리를 꽉 잡은 손이 떨렸다. 균형을 잃은 다리가 금방이라도 힘이 풀려버릴 것 같았다. 내게 허락된 동경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내게 마음 편히 그리워하고 보고 싶다 울부짖을 자격은 없다.
아무런 의식도 없이 흘러나온 눈물을 대충 닦을 순간이었다.
“아~!”
쾅! 문을 크게 여는 소리와 함께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은 연정 누나였다. 비상계단에서 나오는 건지 거친 발걸음 소리가 잇따랐다.
“최이준이 술 다 먹었어~ 혼자 소주 세 병을 먹어~”
“넌 다섯 병 마셨잖아.”
“네에? 그게 무슨 음해입니까, 삼초온~ 제가 다섯 병을 어떻게 먹어요~ 허위 소문 퍼트리시면 안 됩니다!”
연정 누나의 걸음마다 부스럭거리는 봉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연정 누나의 옆에는 아버지가 함께 계셨다. 목소리만 들어도 술 냄새가 풍겨오는 것 같았다. 소주 다섯 병에도 안 취할 만큼 연정 누나 주량 센 걸로 알고 있는데, 도대체 얼마나 진탕 마셨길래 저 정도인 건지.
“흠흠, 미안. 내가 너무 많이 마셨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형이 평소와 같은 목소리를 내보내었다.
“아니지, 그게 아니지. 너 바보야, 최이준? 그럴 땐 빈 병을 슬쩍 옆 사람한테 넘기면서! 죽어라 발뺌을 떼는 거야~”
“그렇지만 내 옆자리에는 연정이 네가 앉아 있잖아.”
아무 말 없이 멍한 표정으로 형을 바라다보던 연정 누나가 한참을 정적을 유지하다 다시금 입을 열었다.
“……오.”
그러더니 누나는 무해하게 몇 번 웃어 보이며 형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런 누나를 보던 아버지가 깊게 한숨을 쉬시고는 엄마의 옆에 앉으셨다.
“왜 계단으로 왔어? 엘리베이터 안 타고.”
“엘리베이터 너무 느립니다. 술이 날 기다리는데 한시라도 빨리 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손에 들려 있던 봉지를 책상 위에 올려두는 누나의 입꼬리가 금방이라도 하늘을 찌를 것 같았다.
“나는 화향이 맛있는지 모르겠다니까요? 자고로 소주는 깔끔한 게 포인트인데 거기다가 왜 꽃향기를 섞냐고. 그게 왜 인기가 있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네.”
요즘 애들 입맛이 이상하다며 연정 누나의 궁시렁대던 목소리는 다시 말을 꺼낼 때 금세 도로 밝아졌다.
“자, 그럼~ 이 차 시작!”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짓던 누나는 봉지에 손을 넣어 안에 있던 물체를 꺼내 들었다. 술을 사 온 줄 알았는데 무언갈 집고 봉지 밖으로 빠져나온 누나의 손에는 웬 초코우유가 들려 있었다.
“어라.”
연정 누나도 금시초문이었는지 누나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뭡니까, 이거. 설마…… 설마! 제 술 삼촌이 빼돌린 겁니까?!”
“네가 술이랍시고 사 온 거다.”
“……예?”
누나는 세상 잃은 듯한 표정으로 한참을 멍하게 초코우유를 바라보았다.
“……방금 제 세상이 무너졌습니다.”
아버지한테 알려주셨어야지 너무하다며 투덜거리는 연정 누나가 풀이 죽은 채 초코우유를 봉지에 대강 다시 넣어버리고는 책상 위를 살폈다. 아무리 봐도 내 눈엔 빈 병밖에 안 보였는데 귀신같이 이준 형 옆에 남아 있던 새 맥주캔 두 개를 누나가 발견했다.
“술!”
두 눈을 반짝인 채 맥주캔을 향해 손을 뻗자 이준 형이 멀리 슬쩍 밀어버렸다.
“안 돼, 연정아. 너 지금 너무 많이 취했-”
쪽.
“내 거~”
갑작스레 벌어진 짧은 입맞춤에 형의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스르륵, 누나가 잡고 끌어당겼던 형의 넥타이가 누나의 손을 살며시 떠나갔다. 내 거라는 지칭이 형을 향한 건지, 술을 향한 건지 알 새도 없이 형이 굳어버린 사이 재빨리 누나의 손에 남은 두 개의 맥주병이 잡혀 왔다.
시원하게 울려 퍼지는 캔 따는 소리와 동시에 형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어머어머.”
두 사람의 애정 행각을 보는 엄마의 눈빛, 어디서 많이 봤는데……, 아, 선아 누나. 누나가 딱 로맨스 관련 미디어 매체 볼 때와 똑같은 눈빛이네.
“봤어, 태호야? 봤어? 너무 귀여워. 어떡해!”
아버지의 팔을 톡톡 치시며 즐거워하시는 엄마와 달리 둘을 보는 아버지는 무표정, 아니 조금 질색하시는 듯해 보이셨다.
알 수 없는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누나가 맥주를 마셨다.
“크으~! 이거지!”
호탕하게 올라갔던 입꼬리는 약간 내려가 슬며시 걸리고, 본부를 가득 채우던 목소리는 차분히 내려앉았다. 의연히 찾아온 적막이 이어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사실 다 알고 계시잖습니까?”
맥주캔을 책상에 올려두며 말을 꺼내두는 연정 누나의 목소리에 감출 수 없는 쓸쓸함이 묻어 나왔다.
“태호 삼촌, 거짓말 진짜 못해~ 안 알려줄 거면 티를 내지 마시던가요.”
거짓말을 못 한다는 말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계속 무어라 중얼거리며 연정 누나가 의자에 앉는 듯했다.
“그거 좀 알려주면 뭐가 덧나나. 삼촌 너무한다, 진짜. 우리 특경부가 지금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데!”
“취했으면 곱게 들어가서 자라.”
“안 취했어!”
탁! 책상을 치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허.”
자신을 향한 연정 누나의 태도에 아버지가 헛웃음을 지으셨다.
“거울이나 보고 말해.”
술을 마시는지 잠시 연정 누나가 말이 없었다. 또다시 탁, 소리가 짧게 들렸다.
“이해가 안 됩니다. 전부 알면서 대체 왜 저희한테 안 알려주시는 겁니까? 아시면서, 왜 안 움직이시고 가만히 지켜만 보시는 겁니까?”
술에 취해 있던 누나의 목소리에 점차 힘이 들어갔다.
“솔직히 삼촌이 왜 특경부를 만들었는지도 모르겠고, 왜 속성 대표님들이 안 나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실군단이고 자시고 대표님들 앞에서는 다 속수무책이잖습니까. 프로젝트 0호도 삼촌이 직접 나셨더라면 육 년은 무슨 하루 만에 바로 끝났을 텐데.”
단 한 번도 아버지의 판단을 의심해 본 적 없다.
당연히 모든 일에 아버지와 속성 대표님들이 나서신다면 무엇이든 간단하게 해결되겠지.
강압적으로 나가신다면 불법 속성 사용자가 나올 일도 없을 테고, 프로젝트 0호도 육 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고, 실군단이든 그의 조력자이든 우두머리든 속성 대표님들이 나서신다면 모두 한낱 작은 잡것에 불과할 것이다.
이유가 분명 있겠지만, 도저히 무의식에 싹 피운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왜…… 나서시지 않은 거지?
“박연정.”
새벽을 담은 공기가 순식간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우리가 나서서 모든 일을 해결하면 그게 전부 무슨 소용이냐.”
연정 누나의 물음에 대답을 해주시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돌리시던 아버지가 보다 더 진지해진 목소리로 나직이 말씀하셨다.
“우리도 우리가 직접 나서는 게 편하다. 더 쉽겠지. 굳이 한 번 꼬아서 일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한 번에 끝낼 수 있으니. 긴 시간을 소모하지 않아도 되고 무엇보다 너희들을 위험에 던져 놓지 않아도 되잖느냐.”
아버지는 변함없으셨다. 감정이 전혀 실리지 않은 표정과 목소리는 여전하셨다. 변함을 품은 건 왜인지 점차 서글퍼지는 나였다.
“세상에 영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찬란하게 빛나던 별은 언젠가 가장 차갑게 지기 마련이야. 무참히 식어 서서히 지기 시작하면 어떤 수를 써도 그날의 찬란을 되찾을 수 없어. 과거는 그저 놓지 못할 미련일 뿐이다.”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현실은 직시해야 하는 것이지. 미래는 후예들을 위한 세계이고. 그러니 아직은 찬란을 유지하고 있는 우리가 지금 너희에게 홀로 서는 연습을 시키는 거다. 이 자리에서 한 걸음 물러난다 하여도 손색이 없도록.”
캔 속에 남아 있는 술이 아버지의 손에 의해 찰랑거렸다.
“……연습은 나중에 죽어라 열심히 하겠습니다. 연습이 부족해도…… 생각하기도 싫지만 만일 정말 혼자 서야 되는 날이 온다면, 걱정하시지 않도록 잘하겠습니다.”
캔을 잡고 있던 연정 누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니, 이번만은 제발 나서주시면 안 됩니까?”
연정 누나의 떨리는 목소리가 전해진다. 누나가 무엇 때문에 이리도 간절히 아버지에게 부탁하는지, 그 목적이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네 입으로 네가 그러지 않았느냐. 실군단이고 뭐고 대표들 앞에선 다 속수무책이라고.”
“…….”
“괜찮을 거다. 다친 곳 하나 없이 무사할 거야.”
연정 누나가 아버지 옆에 앉아 계시는 엄마에게 눈길을 보내었다. 엄마는 아무 말씀 없이 그저 슬며시 미소 지을 뿐이셨다.
“……진짜, 다들 너무하십니다.”
여러 감정들로 복잡해진 마음을 취기에 무시해 버리려는 듯 누나가 또다시 캔을 들었다. 그때였다.
“그렇게 계속 서서 엿듣기만 할 거냐.”
다음 주 금요일(5월 9일)에 연재될 '제11막 불길에 타버린 사랑(12)'는 "불의 나비 - 4"에서 찾아뵙겠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기나긴 이야기를 꾸준히 찾아와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독자님들에게 애정 어린 감사를 심심히 표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