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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막 불길에 타버린 사랑(10)

불의 나비 89화

by 매화연

뚝뚝 멈추지 않고 떨어지는 피가 멎기도 전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본부 안에서 나타난 본부의 환한 빛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이미 모두가 퇴근했어야 될 자시의 한가운데 속 본부에는 이준 형과 연정 누나와 선아 누나, 진우와 인혁이 있었다.


“너…….”


내 모습을 본 진우가 입을 열었다.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와 긴장이 한꺼번에 풀린 탓일까, 순식간에 통증이 급증하며 몸에 남아 있던 조금의 힘마저 쭉 빠져나가고 말았다.


“서진우……, 박인……혁…….”


순간 눈앞이 핑 돌며 몸이 휘청거렸다.


“어어, 야 이도헌!”


옆에 있던 인혁이 재빨리 팔을 뻗어 나를 붙잡았다. 손에 들려 있던 팔찌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시끄러운 소음을 발생시켰다. 인혁의 팔에 의지한 채 다시 중심을 잡고 일어서서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


인혁의 눈길이 왼쪽 옆구리의 깊은 상처로 향했다.


“어떤 놈이 그랬냐? 누가 이랬어. 실군단? 우두머리? 아니면 조력자가?”


심각하게 인상을 쓰며 인혁이 연신 물었다. 누가 이랬냐고, 당장 죽여버리라니까 말해보라고,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말로 나를 걱정하는 인혁의 얼굴을 보자 순간 울컥 치밀어오는 서러움과 아픔을 차마 삼키지 못하였다.


“……아파.”


가다듬지도 못하고 낮게 잠겨버린 날 선 목소리로 겨우 내뱉은 한마디가 본부의 비통한 적막을 불러일으켰다.


뜨거워지는 눈시울에 눈물이 고이는 느낌이 썩 좋지 않았다. 눈가에 걸려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려온다 한들 개운하지도, 아픔이 가시지도, 슬픔이 사라지지도, 떠난 불행의 자리에 행복이 찾아오지도 않았으며, 애당초 불행이 떠나지도 않았고, 다시 일어설 수도 없었다.


“아파…….”


인혁의 어깨에 머리만을 기댄 채 나직이 중얼거렸다. 상처가 토해내는 뜨거운 피의 끈적거림이 그 위를 덮은 손을 적셔갔다. 잠시 당황하던 인혁의 손길이 이내 내 머리에 안착하였다.


무너진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약한 모습을, 애달픈 눈물을, 썩어가는 마음을 드러내기 싫었다. 하지만…….

그런 날이 있다.


그동안의 쌓여왔던 슬픔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저히 버티지 못하겠는 날. 살아가기 위해, 앞으로 더 버티기 위해 눈물을 흘려야 되는 날. 감정 조절이 고장 난 날.


그런 날이 올 때면 나 자신을 혐오하게 된다. 감정 하나 마음대로 다루지 못하는 내가 너무나도 한심하다.


“지금 김 원장님 불러올 테니까 일단 치료부터…….”


“가지 마.”


옆에서 상처를 확인하던 진우가 어딘가로 떠나버리려 한다는 생각에 미치자 어느새 진우의 옷자락을 잡으며 가지 말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가지 마, 서진우…….”


쓰라린 통증을 뱉어내는 복부가 욱신거렸다. 졸려오는 목구멍에서 막힌 울음소리는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아니, 내가 억지로 소리를 누르고 있었다.


이명이 극대화된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머리가 깨질 듯 아파 왔다. 잠시 진정됐던 숨이 점차 가빠 오고 심장이 조여 온다. 나에게 말을 거는 내 사람들의 얼굴이 희미해져 갔다.


울렁거리는 아찔한 느낌과 함께 그만 정신을 잃었다.



“역시 눈치가 빠르십니다, 한 협회장님.”


그날, 처음 들었던 우두머리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온통 헤집고 다닌다.


“음, 실군단의 우두머리라고 해두죠.”


다신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아, 그러고 보니 아직 실군단의 존재를 모르겠군요. 뭐, 좋습니다. 조금 빨라져도 상관없겠죠.”


다신 보고 싶지 않은 장면들이,


“풋, 푸하하하!!”


재현을 이루고


“아아, 이런. 너무 눈물겨운 장면에 그만.”


지치고 헐뜯기고 망가져 버린 내 모습을 잔혹이 비추며


“아주, 좋은 사부를 두었군.”


사부의 존재와 실군단의 생존과 무능력한 나를


“이제 막 공연의 서막이 열렸는데 벌써 결말부터 바라보는 행동, 정말이지 시시하기 그지없군.”


멋대로 섞어버린다.


“잘 봐, 이도헌.”


어느새 내 옆에 나타난 우두머리가 나의 어깨를 잡으며 귓가에 잔잔히 속삭였다. 환한 하늘색의 빛이 어둠에 한 차례 커다란 금을 낸다.


“네가 자초한 일이야.”


……내가.


“전부, 너 때문이야.”


전부 나 때문이야.


“허억……!”


거친 숨을 내뱉으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꿈이라는 걸 자각하자 왜인지 모를 안도감과 늘 그랬듯 나를 옭아매는 죄책감이 깊게 스며들었다. 대체 이 꿈만 몇 번째인지…….


눈을 뜨자마자 다시금 두통이 재개되었다. 한 손으로 머리를 집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얘네는 왜 여기서 자고 있는 거야.”


바닥에 앉아 침대에 기댄 채 졸고 있는 진우와 인혁의 모습이 보였다. 진우의 옆에는 선아 누나가 진우의 어깨에 기대 자고 있었다. 시계를 확인해 보니 어느덧 새벽 세 시였다.


나는 선아 누나를 조심히 안아 들어 침대로 옮겼다.


“으음…….”


인상을 쓰며 누나가 뒤척였다. 깬 건가 싶더니만 다시 편안하게 잠들어 있었다.


“도헌아…….”


나를 부르는 누나의 잠꼬대에 몸을 흠칫 떨었다. 거참……, 잠잘 때만이라도 내 걱정은 좀 놓-


“이, 개자식아……. 걱정 좀 그만 시켜, 인마……. 죽을라고…….”


“……허.”


이 정도면 깨어 있는 거 아닌가.


불편한 자세로 졸고 있는 둘에게 침대에 있던 이불을 가져와 덮어준 뒤 며칠은 움직이지 않은 듯 찌뿌둥한 몸을 움직여 문고리를 잡았다.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야? 그것도 이렇게나 빨리.”


작은 문틈 사이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우뚝 손을 멈췄다.


“취하고 싶어서 이러는 건데, 취하지를 않네요.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천천히 마셔. 숙취 심한 편이잖아. 아침에 고생할라.”


“하하, 네. 그래야죠.”


이준 형의 목소리를 평소와 다름없었다. 언제나 그랬듯 차분했고 다정했고 따뜻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이미 중심을 잃고 한 번 추락하여 금이 간 벽돌을 다시 최대한 빠르게 쌓아 겨우겨우 유지하던 균형도 이제는 완벽하게 무너져 내렸으면서 억지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고 있었다.


“최 소장 생일은 여전히 안 챙기고?”


“간단한 선물에 작은 쪽지를 건넨 게 다입니다. 직접 얼굴 보고 생신 축하한다는 말을 꺼내지도 못했어요. 은연중에 케이크만 같이 먹고요.”


“그 정도도 뭐, 많이 나아졌네.”


형은 미안함을 가득 담은 웃음을 내보였다.


“이준아.”


“네.”


“아빠가 동생들만 챙겨서 섭섭하니?”


엄마의 물음에 형은 웃음을 섞어가며 답했다.


“섭섭할 리가요. 애초에 도헌이가 걱정돼서 깨어날 때까지 본부에 있겠다고 제가 말한 거고요. 기억이 나지 않을 테니 어떻게 보면 이번에 어머니를 처음 보는 것일 텐데 얼마나 놀랐겠어요. 아직 어린애들이. 제가 나이가 몇인데 고작 이런 걸로 섭섭해하면 안 되죠.”


“어머? 스물아홉이면 아직 애기지, 애기.”


부드러운 엄마의 웃음소리가 조금씩 사그라들고 입가에 다정한 미소만이 남았다.


“아홉이든 열아홉이든 스물아홉이든 서른아홉이든 마흔아홉이든 부모 눈에 자식은 항상 아기야. 아무리 컸어도 얼마나 작고 여려 보이는데. 그냥 평생 옆에 두고 같이 살고 싶을 정도로 예쁘고 너무 소중하지.”


부모의 사랑. 부성애와 모성애. 대상이 운명일지언정, 세계일지언정 그 사랑은 누구도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신이나 운명이 아니다. 모든 것에 대적하는 사랑은 그 무게와 깊이가 너무도 그윽하게 거대하여 마침내 온 세상을 지배해 버린다. 그 사랑은 또 다른 사랑을 낳고 내리사랑과 치사랑이 반복되며 그렇게 세계가 지속되는 것이다.


“그렇게 자그마한 내 이쁜 자식이 혼자 끙끙 앓고 있으면 가슴이 찢어져. 그 어린것이 감당하지 못할 슬픔을 억지로 삼키고 있는데 부모가 되는 마당에 도움도 못 주고 있으니.”


엄마의 목소리에 담긴 쓸쓸함 한 조각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차 멋대로 불어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준아. 이제는 강한 척하지 않아도 괜찮아.”


복잡하게 엉킨 채 돌아가는 사고 회로를 완전히 고장 내버리는 그 한마디가 나를 향한 것이 아님에도 왜 내 마음이 요동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슬퍼해도 되고 그리워해도 돼. 버티지 않아도 정말 괜찮으니까. 동생들 앞에서는 듬직하게 자리를 지킬지언정 적어도 삼촌이랑 이모, 아빠 앞에서는 무너져도 돼.”


지금의 난 형의 복제인간이 된 것인 마냥 보이진 않으나 형이 하고 있는 행동을 완전히 따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사부 때문이잖습니까. 사부가 자꾸 옆에서 괜찮다고, 제 잘못이 아니라고 속삭이니까 못 버티겠잖아요.



앞으로는 매주 금요일만 불의 나비가 연재가 됩니다! 오늘도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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