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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미래 Jul 19. 2024

MBTI의 구원

성격유형검사 덕에 이해받은 나.

첫째, 갑자기 만나자는 전화에 공포를 느낀다.

둘째, 약속에 취소되면 지나치게 기뻐한다.

셋째, 말이 없고 무뚝뚝하다.

넷째, 혼자 있는 시간이 무조건 필요하고 중요하다.


나는 남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 전혀 익숙하지 않다. 낯선 사람과 대화를 할 때는 손을 가만 두지 못하고 꼼지락거리고, 얼굴이 한층 상기되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늘어놓기도 한다. 평생을 소심하고 낯 가리는 성격으로 살아온지라 말을 한다는 건 여전히 쉽지가 않다.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를 하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 흡사 노동과 같이 느껴지는 나는 MBTI가 등장하기 전까지 여러 가지 방면에서 타인에게 이해받지 못한 적이 많았다. 내가 성인이 될 무렵 성격 판단의 지표와도 같이 쓰였던 기존의 원로스타 혈액형이 물러가고 신인 MBTI가 등장했다. 나는 이 신인의 등장이 굉장히 반가웠다. 나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줄 구세주와도 같기 때문에.


이 덕에 나는 물음표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왜 밖에 나오는 게 싫어?, 약속 취소됐는데 왜 좋아하는데?, 집에 혼자 있는 게 뭐가 좋아?, 안 답답해?, 너는 왜 네 이야기를 안 해?, 영화를 왜 혼자 봐?, 등등. 솔직하게 대답하면 상대가 상처받을 것이 뻔한 이 질문들에 대해 이제는 내가 대답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먼저 너 I라서 그래, 너 T라서 그래 라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나조차도 과거의 나에 대해 이제야 헤아리기 시작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늦잠을 자 지각을 한 적이 있다. 부랴부랴 급하게 고양이 세수만 하고 가방을 챙겨 학교로 갔는데 이상하게 수업 중인 교실문을 열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다들 나를 쳐다보면 어떡하지?, 나를 이상하게 보면 어떡하지?, 사소한 두려움이 어린 나의 머릿속에서 증폭되어 발이 얼어붙은 듯 땅바닥에 묶인 기분이었다. 울먹거리던 나를 교실문 창으로 포착한 담임 선생님이 교실로 인도해 주셨었다. 흑역사가 불쑥 생각나는 밤이면 이불을 차며 그때 왜 그랬지 생각했었는데 MBTI가 등장하곤 내가 내성적이라서 그랬구나, 하고 어느 정도 나를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아, 물론 지금은 1시간 지각을 해도 수업 중인 강의실 문을 박차고 들어갈 수 있는 당돌한 대학생이 되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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