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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미래 Jul 15. 2024

나를 알아간다는 건 어쩌면 일상의 이유.

삶의 과제이자 나를 돌보는 방법


늦은 아침 이불에 닿는 촉감이 좋아 침대에서 발을 떼기 힘든 사람, 수면욕보다 식욕이 강해 야식을 밥 먹듯 먹는 사람, 남이 던지는 차가운 말에 상처를 잘 받지만 타인에게 따스한 말 한마디 건네는 게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보다 힘든 사람, 내 수저보다 함께 식사하는 사람의 수저를 먼저 챙겨주는 사람, 겉으론 틱틱대지만 속으론 누구보다 상대방을 응원하는 사람, 남들 앞에서는 괜찮은 척, 쎈 척 하지만 속은 생각보다 여리고 소심한 사람. 그래, 이게 나의 모습이다.


갓 성인이 된 스무 살, 그 당시 나는 재수생이었다. 수능을 다시 보는 것은 아니고, 특기전형으로 대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것이 넘쳐났던 고등학교 시절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장래희망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이도저도 아닌 상태였다. 그런 상태로는 대학에 진학한다고 해도 열정도, 의지도 없을 것이라는 나의 자체적인 판단 끝에 1년 동안 잠시 쉬어가는 시간을 가지기로 결정했었다.  


그 시기에 나는 나 자신이 너무 어려웠다.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어떤 옷이 잘 어울리는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인테리어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그동안 조금이나마 쌓아 왔던 '내 것'이라는 게 전부 백지화된 기분이었다. 스무 살이 되고 처음 이사 간 집의 내 방을 꾸미려고 인터넷 어플에서 고른 물건들을 배송받아 방에 걸쳐 보고 나는 눈물을 터뜨렸다. 택배로 받은 물건들 중 단 한 가지도 내 방에 어울리는 물건이 없었다.


그 눈물의 의미는 내 일상이 망가졌다는 마음에서 흐른 눈물이었다. 베이지 톤의 커튼은 너무 두껍고 색이 진해 어디에 걸어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하얀색 헤링본 러그는 방에 비해 너무 크고 무늬가 이상해 쳐다도 보고 싶지 않았다. 인테리어 쇼핑의 처참한 실패 이후 나의 방은 약 1년간 이삿짐 박스를 풀지 않은 채로 멈춰 있었다. 전 집에서 쓰던 하얀색 철제 선반과 이삿짐 박스, 침대만 두고 필요한 물건은 그때그때 박스에서 꺼내서 쓰곤 했다. 하고 싶은 일이 없어짐과 동시에 나에게 일어났던 파장이 아닌가 싶다. 장래희망, 내 취향 모두 휘발된 가장 최악의 시기였다. '내 것'이 없다는 건 나의 존재의 이유가 없어지는 것과 거의 동일하다.


분노를 숨긴 고요한 바다 같았던 1년을 겨우 보내고 대학에 진학했을 때는 서서히 나를 알아갔다. 이제는 어떤 걸 좋아하고 무슨 색이 나에게 잘 어울리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몇 안 되는 나의 친구들이 종종 나에게 1년간 대회 준비를 하며 휴식기를 가졌던 시간이 후회되지 않냐고 물었다. 스무 살에도, 스물한 살에도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조금도 후회되지 않는다고. 나에 대해 모르고 어두웠던 그 시간이 있음으로써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 1년 동안 내가 깨달은 것은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도합 12년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고 나만의 길을 개척하기엔 턱 없이, 정말이지 턱 없이 짧다는 것이었다. 학생의 신분으로서 사는 그 짧은 시간은 비전을 찾기보단 나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아가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다시 발돋움하기 위해 사용했던 1년이라는 시간도, 교복이 피부와 같았던 시간도 나중에 나이가 들어 저 먼발치에서 그 시간을 바라볼 수 있는 나이가 됐을 때는 손톱의 때만큼 작은 시간으로 보일 것이다. 1년도, 12년도 내가 앞으로 살아갈 시간에 비하면 다 큰 어른이 5살짜리 어린아이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짧은 시간이다. 그럼에도 그 시간을 견디고 살아내야 하는 이유는 오직 내가 어떤 사람인지, 뭘 원하는지 알아가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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