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업무가 지나가고 오랜만에 여유로운 주말 아침을 맞았다. 일어나 베개 밑을 보니 머리카락이 두 가닥 빠져있었다. 마음이 조금 언짢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손으로 주워 쓰레기통에 버렸다.
탈모 진단을 받은 지 언 1년이 넘게 지났다.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충격은 컸지만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작아졌다. 매일 만지던 정수리도 바쁜 업무 덕분에 점점 신경 쓰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이마를 파먹고 있는 M자 탈모 역시 체육관 장난꾸러기들이 건들지 않는 이상 크게 개의치 않게 되었다.
그렇다고 약을 먹는걸 게을리하진 않았다. 귀찮다는 이유로 한 두 달 빼먹은 적이 있었는데, 금세 빠지는 모발의 양이 꽤 늘어 당황했다. 때문에 약은 매일매일 먹으려 노력하고 있다. 약 때문에 좋아하던 술도 많이 줄였고, 유산소 운동도 늘려가며 약효를 최대한 높이려 애썼다.
노력에 비해 결과는 드라마틱하진 않았다. 그냥 지금 현상을 유지하는 정도. 물론 내가 이것 말고도 조금 더 노력했다면 더 나은 상황을 맞이했을 수도 있다. 미녹시딜같이 바르는 약을 꼼꼼히 꼬박꼬박 바르고, 조금 더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면 지금쯤 더 빽빽한 머리카락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늘 빡빡한 직장생활과 늘 줄줄 새는 계좌 상태는 내 발목을 꼭 잡기 일쑤였다. 아쉽긴 해도 숨을 헐떡거리면서까지 머리카락을 붙잡기엔 내 노력의 체력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때문에 조금 쉬어가며 탈모라는 긴 마라톤을 천천히 걸어가는 중이다.
점심을 대충 먹고 창문에 팔을 걸쳐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른한 오후, 하늘은 미세먼지 때문에 희뿌였지만,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에서 일어나는 봄바람은 나쁘지 않았다. 바람을 맞으며 눈꺼풀이 조금씩 무거워졌다. 그렇게 낮잠을 맞이하려던 때, 휴대폰에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오늘 웨딩촬영했다’
고향 친구들 단체 채팅방에 L이 웨딩 촬영본을 올렸다. 이게 그 코찔찔이 때부터 봤던 그 찐따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훤칠하게 뽑힌 사진이 인상적이었다. 때문에 오랜만에 친구들은 온갖 주접을 떨며 L을 치켜세워줬다.
‘그래 탈모도 있고 허리도 안 좋아도 다~아 괜찮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니’
‘인간승리다 바로 이게!’
‘너네도 빨리 결혼해야지’
‘뭐 언젠간 가겠지?’
‘어... 너는 잘 모르겠다 사실’
역시 잠깐을 못 가고 서로를 물어뜯으며 이야기는 마무리되었다. 늘 있는 일이지만, 오늘은 친구의 웨딩사진을 보니 묘한 외로움이 조금 차올랐다. 그러다 보니 오랜만에 다시 정수리를 만지작 거렸다. 살짝 뜨뜻하고, 맨살이 조금은 느껴지는 그 촉감은 여전했다.
예전 같으면 머리를 매만지며 우울감이 같이 찾아왔겠지만, 희뿌연 주말 하늘처럼 내 머릿속 역시 크게 선명하지 않았기에, 크게 대미지를 입진 않았다. 그저 커피 한 잔을 먹고 싶은 데 아메리카노를 먹을지 오랜만에 달달한 바닐라 라떼를 먹을지 그 생각뿐이었다.
나는 의자의 등받이를 눕힌 뒤, 웅크린 자세로 배달어플로 아메리카노를 시킨 뒤, 유튜브를 실행했다. 한 때는 탈모, 탈모약 부작용 관련 동영상으로 가득 찼었는데, 지금은 다른 동영상들의 비중이 더욱 컸다. 나는 별생각 없이 유튜브 숏츠를 재생했다.
별 시답잖은 영상들이 짧고 의미 없이 지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탈모에 대한 놀림거리가 주제인 동영상에 어떤 대머리 아저씨가 등장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쿠팡이랑 일본의 부자라는 키워드로 알고 있던 이름이었다. 나는 이런 부자도 대머리란 사실이 꽤 우스웠다. 동영상에는 트위터로 손 회장의 탈모를 놀리는 일본인 네티즌의 말이 먼저 띄워졌다.
“회장님, 머리카락이 점점 후퇴해 대머리가 되어 가는 것 같네요?”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그 후 빠르게 튀어나오는 손 회장의 리트윗은 아주 일품이었다.
기가 막힌 명언에 무릎을 탁 치며 감탄했다. 역시 세상을 움직이는 리더는 생각이 달라도 한참 달랐다. 스치듯 지나간 동영상 한편에, 조금이나마 남아있었던 우울감 역시 자취를 점점 감췄다.
물론 앞으로 삶을 살면서 다시 내 머리카락 때문에 상처 입을 순간은 분명히 올 것이고, 다시 고민할 시간 역시 수없이 많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역시 그럴 것이고, 탈모보다 더욱 벅찬 세월의 흐름에 지쳐 뒷걸음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늘 다시 그랬듯 결국 시간은 지날 것이다. 그리고 만족스럽지 않을지언정 나름의 답을 찾을 것이다. 그렇게 삶을 전진하고 또 전진할 것이다.
“띵동!”
배달원이 누른 벨소리가 들렸다.. 멍하니 앉아있던 나는 눈을 번쩍 뜨고 그렇게 오늘을 기쁘게 채워줄 커피를 맞이하러 경쾌한 발걸음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