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모약을 먹은 지 3개월이 되었다. 봉지를 가득 채웠던 약이 어느새 바닥을 보였다. 약을 새로 받아야 했지만, 마침 회사 업무가 몰리던 시기였다. 때문에 원래 처방을 받았던 대구의 병원으로 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때문에 난 집 근처에 있는 탈모약 처방 병원을 찾아보았다. 포털사이트에 있는 여러 후기와 블로그 글들이 가득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에, 난 그중 가장 빠르게 진료를 볼 수 있다고 알려진 병원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다음 날, 오랜만에 오전 반차를 내고 병원으로 향했다. 내심 혼자 탈모약을 처방받으러 병원 입구로 향하니 다시 점차 부끄러웠다. 탈모약을 3개월이나 먹고 있지만, 부끄러움은 더디게 치유되고 있었다.
나는 쭈뼛대며 병원 건물에 들어섰다. 전에 갔던 곳과는 다르게 비뇨기과와 피부과가 주요 과목인 병원이었다. 동네에서 볼 수 있는 친근한 감성에 괜한 긴장감이 사라졌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접수처의 간호사가 상냥하게 맞이해 주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아... 그... 탈모약 처방받고 싶어서요.”
“네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탈모약이란 말을 듣고 피식 웃지 않을까 하는 망상이 잠시 스쳤지만, 간호사 선생님은 그런 모습은 전혀 없이 친절하고 무던하게 접수를 받아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나는 진료실로 향했다. 진료실에는 젊은 남자 의사 선생님 한 분이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김노난씨. 탈모약 처방 때문에 오셨다고요”
“네... 두타스테리드를 먹고 있는데, 약이 다 떨어져서요”
“그래요?? 잠깐 한 번 머리 좀 볼까요?”
의사 선생님은 두 손으로 내 머리를 이리저리 만지며 유심히 관찰했다. 다만 나는 책상 앞으로 머리를 빼꼼 들이민 모습이 다소 수치스러웠다. 의사 선생님은 내 정수리 모근을 잠시 만지고 앞머리를 들쳐 올려 M자 탈모 역시 꼼꼼히 확인했다. 그렇게 짧은 검사가 끝난 후, 그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어... 탈모약 먹을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네? 대구에 있는 병원에서 탈모 맞다고 해서 먹고 있는 건데요.”
“아뇨. 탈모약을 먹을 정도로 심한 탈모는 아닌 것 같아요”
검사를 마친 의사 선생님은 컴퓨터로 돌아간 뒤 모니터를 돌려 나에게 PPT로 된 화면을 보여주었다. 그곳엔 탈모 방지를 위한 생활습관들이 적혀있었다. 머리를 아침저녁으로 살살 감는다. 두피쿨링을 한다 같은 단순한 내용들이었다.
“요 내용 휴대폰으로 찍으신 다음에 따라 하시면 될 거예요. 약은 굳이 지금 드실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이미 진단을 받은 건데요... 탈모 맞다고”
“탈모 전문의원에서는 웬만한 극 초기 단계도 다 탈모약 처방을 해요. 그런데 초기부터 탈모약을 먹는 건 좋지 않아요. 특히 두타스테리드 같은 센 약을 바로 먹는 건 장기적으로도 좋지 않고요”
“기계로 이리저리 봤는데도요? 머리카락이 얼마나 가늘게 나오던데요...”
“사람 머리를 확대해서 보면 웬만한 사람들 다 그렇게 나와요. 아무튼 탈모약까지 먹을 단계의 탈모는 아니니깐 약 처방은 하지 않겠습니다 ”
예상치 못한 답변들에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분명 정수리는 중기 직전이라고 했는데... 무엇이 맞는 건지 당황스러웠다. 결국 나는 진료비만 결제한 후 병원을 나왔다.
점심을 먹기 위해 근처 우동집에 들렀다. 식탁에 앉아 대충 주문을 한 뒤, 스마트폰으로 다시 한번 탈모 증상을 검색해 봤다. 온갖 정보가 혼재한 화면 속에서 나는 탈모이기도 했고 탈모가 아니기도 했다. 하지만 결론은 의사 선생님의 말을 곱씹으며 점점 기분이 오묘하게 좋아지기 시작했다. 때문에 나는 카카오톡을 켜 단체톡방에 이 사실을 알리기 시작했다.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L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말도 안 된다는 듯 나에게 이야기를 건넸다.
“뭔 소리야 미친놈아. 어디 돌팔이 병원을 가서!”
“아~ 약 먹을 정도는 아니라고 하시잖아!”
“아니야. 너 탈모 맞아. 탈모 맞다니깐”
“아니 네가 의사냐? 암튼 끊는다!”
“야... 야! 정신...”
나는 뚝 전화를 끊었다.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가슴속에서 예상치 못했던 희망이 솟구쳤다.
‘그래... 나는 아직 그 정도는 아닌 거였어. 하하... 나는 아직 괜찮다고!!’
그렇게 내가 점점 차오르는 기쁨 속에 빠져있을 때, 휴대폰 속에서는 헛된 희망을 가지지 말라 외치는 L의 메시지가 쌓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