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근처 병원에서 진료받은 후, 탈모에 대한 내 마음가짐은 달라져 있었다. 대구에서 받은 사형선고가 기각되었다는 사실은 나를 상당히 자유케 했다.
“그래. 아직 심한 탈모는 아니잖아”
거울을 쳐다보았다. 눈빛에 오랜만에 자신감이 보였다. 자신감에 겨워 앞머리를 들춰보았다. 이마 능선을 타고 자라난 머리카락이 M자를 그렸다. 하지만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이 정도야 뭐. 어릴 때도 이랬잖아”
낙관 넘치는 판단이었다. 사람이 순식간에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의사 선생님의 한마디가 사람을 이렇게나 쉽게 바꿀 수 있었다니. 나는 목소리를 흥얼거리며 거울 앞을 나섰다. 반면 내 휴대폰 안에서는 누군가 소리 없는 외침을 계속 보내고 있었다.
‘야 정신 차려. 너 탈모 맞아’
메신저에는 L이 계속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는 나에게 그 진단은 알맞지 않은 진단이라 충고했다. 그리고 너는 분명 탈모가 맞고, 지금 약을 끊으면 후회할 것이라고 계속 설득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신경 써 듣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이 괜찮다고 했는데, 괜히 또 그런다~”
나는 L이 혼자 탈모의 구렁텅이에서 남아있게 된 것이 억울해 내 발목을 애써 잡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넓어진 아량으로 그런 L의 푸념을 다 받아주리라 다짐했다. 반면 L은 이런 나의 모습을 보며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주먹으로 퉁퉁 치기 바빴다.
병원에 다녀온 이후로 약 역시 더 이상 처방받지 않았다. 대신 의사 선생님이 알려준 방식대로 머리카락과 두피를 관리하려고 애썼다. 샴푸도 예전보다 더 꼼꼼히 하고 등한시하던 두피 쿨링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노력의 결과였을까? 내 머리카락은 탈모약을 먹을 때처럼 크게 빠지지 않고 잘 버텼다. 이를 보며 나는 내심 흡족함을 보였고, 이에 계속 부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삼 개월간의 희망찬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무언가 점차 조금씩 어긋날 조짐이 보였다. 트리트먼트를 할 때 엉켜 떨어지는 머리카락이 다시 점점 늘어가고, 조금씩 나아져 가던 정수리가 다시 하얗게 맨살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를 보며 나는 다시 다가온 섬뜩한 전운(戰運)을 느꼈다.
“아니... 왜 다시 이런 거지? 분명 나아지고 있었는데”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머리를 감을 때마다, 빗질을 할 때마다 빠지는 머리카락이 점점 많아졌다. 또한 멍하니 있다가도 무심코 머리를 쓸어 넘기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오는 가느다란 머리카락들은 다시 한번 나에게 위기를 상기시켰다.
“아니야, 분명 병원에서 이 정도만 하면 괜찮다고 했잖아...”
나는 병원에서의 말을 곱씹으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비관적으로 조금씩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이 사태를 알게 된 참친구 L은 다시 한번 나를 설득했다.
“노난. 정신 차려. 내가 몇 번이고 말했지. 너 탈모 맞아! 니 이마와 정수리를 보라고!!”
그의 조언을 들으며 머리 위에서 열이 솟구쳤다. 하지만 어린애처럼 고집을 피울 수 없었다. 삼십대면 삼십 대 답게 남의 조언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했다.
그렇게 난 결국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더 이상 그때 그 의사의 말을 믿고 안심할 수만은 없었다. 탈모가 아닐 수도 있지만, 탈모가 아닐 리도 없었다. 그래 애초에 병원에서도 ‘앞으로도 탈모가 없을 것이다’라고 보장한 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밤이 되었다. 나는 불을 끈 채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손으로 정수리를 만지며 고민했다.
어떡해야 할까? 병원을 다시 가야 하나? 약을 먹어야 하나? 혹시 모르니 조금만 더 ‘존버’해볼까? 고민이 많아졌다. 결정이 쉽지 않았다. 나는 그냥 손가락으로 의미 없는 두피마사지만 하며 밤을 보냈다.
아침이 밝았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울 것 같았지만 떨어진 체력 덕분에 금방 잠이 들었다. 오늘만큼은 삼십 대의 저질 체력이 도움이 되었다. 몸을 겨우 일으킨 나의 머릿속은 단순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출근하자마자 회사 ERP 연가등록 메뉴로 접속해 오후 반차를 신청했다. 사유는 ‘병원진료’였다.
그렇게 난 삼 개월간의 짧은 허니문을 끝내고 다시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