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한 회사의 AI 기획자와 개발자
우리는 태생부터 운영체제가 달랐다.
언니가 논리와 인과관계를 따지는 꼼꼼한 맞춤법 사냥꾼이었다면, 나는 군더더기 없이 딱 떨어지는 수학적 명쾌함을 사랑했으니까.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 자체가 달랐던 셈이다. 그 차이는 성인이 된 후 더 선명하게 갈라졌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각자의 성향을 쏙 빼닮은 직업을 택했다. 언니는 대학교에서 외국인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는 한국어 강사가 되었고, 나는 모든 것이 명확하고 설계한 대로 움직이는 개발자가 되었다.
하지만 한국어 강사였던 언니는 코로나로 인해 외국인 학생들의 발길이 끊기자 수업이 줄어들었고, 결국 지금껏 해온 일을 뒤로한 채 직업을 바꾸는 큰 결심을 해야 했다. 그렇게 언니가 먼저 지금의 회사에 자리를 잡았다.
반면에 나는 지난 회사에서의 여러 문제로 한계에 부딪혔다. 다시는 회사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도 해보고, 시작한 순간부터 싫었던 개발자라는 직업도 이참에 포기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나는 일을 통해 자아실현을 해야만 하는 사람이었고, 배운 게 도둑질이라 결국 다시 개발자로 돌아왔다. 다행히 당시 사수였던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며 개발에 흥미를 붙이긴 했지만, 결국 두 번째 회사도 박차고 나오고 말았다. 그렇게 언니가 입사하고 1년 뒤 언니가 있는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한 회사의 AI 기획자와 개발자, 자매이자 동료가 되었다.
우리는 서로의 커리어에 불필요한 편견이 섞이지 않도록, 이 사실을 굳이 밝히지 않기로 했다.
남인 척해야 하는데 마주치면 왜 그리 웃음이 나던지, 나는 괜히 이유 없이 활짝 웃으며 언니를 스쳐 지나갔다. 게다가 잦은 파견으로 늘 비어있던 언니의 자리가 채워지는 날이면, 나에겐 반가운 산책 메이트가 생기는 날이기도 했다. 가끔 같이 점심을 먹을 때면 회사 사람들을 마주칠까 봐 일부러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 구내식당까지 발걸음을 옮기기도 했다.
서른이 넘은 지금도 나는 여전히 언니가 닦아놓은 길 위에 서 있다. 때로는 그 울타리가 답답해 투덜거리기도 하지만, 결국
언니는 내 인생의 오류를 막아주는 유일한 '익셉션 핸들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