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릴 걸 알면서도 사랑스럽다. 저무는 해에 비춰 보는 잎맥처럼 넌 아렴풋하다. 가슴은 터질 줄 몰라서 넌 내 속을 거침없이 헤집고, 나보다 조금 더 넓은 가슴으로 날 품는다.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어디 있었는지, 왜 이제 왔는지, 왜 멀어지던 나를 붙잡지 않았는지, 이중 하나라도 좀 대답해주면 안 되겠는지 물으려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꿈 속에서, 노을은 깃털이 검붉게 젖어 있었다.
스윗소로우, 괜찮아 떠나
내가 갑작스레 입대한 것은 지난 10월의 일이다. 2학년까지는 어찌저찌 끝냈지만, 학교는 좀처럼 나와 맞지 않았다. 대학 생활이 즐거울 나이도 지나버렸다. 게걸스런 능청과 교만에 익숙해지며 난 조금 자랐고, 그건 초심자의 행운에서 멀어지는 일이기도 했다.
불안을 극도로 경계하는 성미상 진작에 병역부터 치렀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방황을 지켜보는 부모님의 권유는 해를 거듭하며 세졌다. 하나 내겐 하고 싶은 일들이 있었다. 그 일들을 해냈고, 성패와는 별개로 뿌듯하게 여긴다.
사랑도 이별도 했다. 그 시간을 멋들어지게 풀어낼 재주는 없다. 잔비가 나긋한 길 위에서 나눈 끝인사. 그 후로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나 입대했으니 정말 끝이다. 한때 누구보다 가까웠던 만큼, 긴 시간 누구보다 멀어질 테니까.
엉겁결에 군복을 입게 됐지만, 내 안에서는 오래 전부터 위와 같은 일들이 도피의 동아줄을 내렸다. 못내 지쳐 있었다.
김동률, Replay
가을의 끝은 지리멸렬했다. 약 1달 반의 훈련을 마치며, 난 산산이 부서지는 새벽빛을 등지고 진주를 떠났다. 주차장 오른편의 마른 나무와 멀찍이 나부끼는 해오름에 마지막 갈피를 찍으며 나는 사라졌다. 추측건대 우리가 그곳에 남긴 건 이를테면 허무의 모래성전이 아니었을까. 부대어 살던 그 젊음의 사구(沙丘)에서 주어담은 가리비들은 낯이 고왔고, 각자가 지은 허무의 성에는 꼭 한 번 옮겨보고픈 파도 소리가 들어 있었다. 몇은 물보라에, 몇은 짓밟혀 무너졌다. 또 누군가의 군홧발이 성의 자취가 머금은 파도 소리를 지웠다. 우리처럼 그들도 전철(前轍)을 밟고 붕괴의 파열음을 들을 것이다.
이소라, 이제 그만
겨울은 나지막하게 왔다. 난 천천히 새로운 생활에 적응했다. 가끔 옛 기억이 찾아들었다. 기억은 사나워서 일그러지지 않았다. 기억은 추억이었다. 추억이 살아가는 힘이 된다는 말을 난 믿지 않았다. 추억은 책처럼 단정하지 않고, 시간처럼 정직한 것도 아니다. 추억은 이별이었다. 겨울이 지나는 그 춥고 가녀린 시간 동안 난 여러 번 이별을 떠올렸고 애써 피했다. 이별의 상흔은 밤을 아득히 길어올렸다. 그럴 때마다 시를 적었지만 다음 날 버렸다. 눈이 몇 번 왔고 배드민턴을 열심히 쳤으며 몇 편의 책과 영화에 눈물지었다. 무심하게 음악을 들었고 가사를 썼다. 그러다 어느새 새봄이 왔다.
봄이 가까워지기 무섭게 설아가 너무나도 그리워졌다. 며칠 참다가 당직 근무날 밤새 글을 썼다. 설아와의 우여곡절을 정리한 문서였다. 춘분이었다.